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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진했는데 왜 불안했을까

익숙함이 두려웠던 5년 차의 선택

by 꿀아빠
2017년, 익숙함이 두려웠다


대학 졸업 후 입사한 첫 회사에서 5년 차.
상품기획·운영을 거쳐 선행상품 업무를 맡게 되었던 시기였다. 해가 갈수록 일은 익숙해졌고, 승진도 했고, 외형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묘하게 불안했다.

자동차(부품) 산업은 폭스바겐 디젤게이트 이후 급변하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전기차 전환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고, 미국에서는 테슬라가 시장을 뒤흔들고 있었다.
‘4차 산업혁명’, ‘딥러닝’, ‘자율주행’ 같은 단어가 뉴스 제목에 매일 등장했다.

그 변화의 속도 앞에서 문과생인 내가 기술 기반 상품기획에서 어떤 차별점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계속 묻게 됐다.


“시대가 이렇게 바뀌는데, 나만 제자리 아니야?”


그 고민이 결국 대학원이라는 선택으로 이어졌다.

KAIST 경영공학 석·박사를 하고 있던 선배를 만나 조언을 들었고, 사내 외 선배들을 점심시간마다 붙잡고 경험담을 모았다. 자대를 갈까, 다른 학교를 갈까, 커리큘럼과 네트워크 중 뭐가 더 중요할까, 학비는 어떻게 마련할까. 그 모든 고민 끝에 KAIST 정보경영 6기에 지원했고, 운 좋게 합격을 받았다.


수요일 밤은 도곡행


매주 수요일 저녁엔 카이스트 도곡캠퍼스, 토요일엔 홍릉캠퍼스로 향했다. 회사에 합격 소식을 알리자 몇몇 선배들이 스케줄을 조정해 주고, 시험 기간엔 눈치 주지 않고 보내주기도 했다.
정말 감사한 마음이 컸다.
물론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그걸 왜 해?”, “문과가 KAIST 경영대학원?”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중 몇몇은 다시 KAIST 다른 전공으로 지원하려고 팁을 물어왔고, 심지어 동아리에서 후배·선배로 또 만나기도 했다.
세상은 참 좁고도 넓었다.

중간에 정말 그만둘까 고민했던 시기도 있었다.
학구열로 타오르는 동기들 사이에서 내가 맞는 길을 가고 있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도 있었다.
시간과 돈만 쓰는 것 같아 자책도 했고, 회사 업무와 병행하느라 체력적으로 버티기 힘들 때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동기들이 건네던 현실적 조언, 격려,

‘나도 그랬다’는 공감이 큰 힘이 됐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 어떻게 새벽까지 팀플하고 과제하고 또 술까지 마셨는지 신기하다.


수업 내용이 당장 업무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고 말하긴 어렵다. 회사 데이터를 활용해 논문을 쓰고 싶었지만 외부 반출 제한으로 아쉬움도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은 내 커리어를 바꾸었다.

진짜 배운 건, 세상이 이렇게 넓다는


통신사에서 온 동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 우리 업계는 이렇게 느리게 움직이기도 하는구나.”
자동차 업계 동기들 이야기를 들으며


“이 변화의 파도는 진짜구나.”


스타트업·IT 서비스 기업 동기들과는 아예 다른 세계를 보는 듯했다.

내가 몸담은 산업에서 벗어난 시선이 들어오니까
그동안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기차, 자율주행, 로봇, AI. 각 분야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공유하면서 ‘내가 서 있는 곳이 빠른지, 느린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수업 후 술자리에서 웃고 떠들고 위로받으면서,
서로의 미래를 그려 나가던 시간이 지금 생각해도 참 소중했다.
그렇게 2년이 흘렀고, 졸업했다.

그리고 내 커리어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커리어가 바뀌었다


첫 회사에서 전기차·자율주행 관련 신기술 브랜딩을 맡으며 CES쇼를 비롯해 크고 작은 경험들을 쌓을 수 있었다. 새로운 트렌드를 직접 마주하며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일이 즐거웠다.

그러다 10여 년을 마무리하고 L社의 B2B 상품마케팅 직무를 거쳐 지금의 S社의 로봇사업팀.

자동차업계에 있을 때 문득 했던 생각이 있었다.
“자율주행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결합이라면, 수행 방식만 바꾸면 로봇이 아닐까?”
그 생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새로운 기회에 도전했고, 다행히 로봇사업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지금은 로봇의 ‘뇌’라고 할 수 있는 AI 서비스 기획을 맡고 있다.

자동차 부품 → 사이니지 → 로봇 → AI.


돌아보면 자연스러우면서도 신기한 여정이다.


나를 사랑하게 된 시간


지금도 종종 동기들을 만난다.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으면 힐링도 되고, 자극도 되고, 또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된다.

신기한 건, 이직을 해도 어디엔가 KAIST 동문들이 있다는 것. 조용한 네트워크가 이어지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도움을 받기도 한다. 작은 연결이 새 인연으로 확장되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대학원 졸업 이후 나는 스스로에 대한 애정이 생겼다.
“선택한 것을 끝까지 해냈다”는 자신감,
“배운 만큼 선택지가 더 넓어졌다는 사실,
“변화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부지런해지는 내 모습”
그 모든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좋은 동기들 덕분에 자극받고, 웃고, 위로받으며 나의 열정과 추진력을 발견했다. 그 에너지가 새로운 선택으로 이어졌고, 지금의 삶까지 이어졌다.

만약 다시 2017년으로 돌아간다면?
아마 다시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학교에서 보내고,
새벽까지 동기들과 과제와 고민을 나누던 그 2년.
힘들었지만 그 시간 없이는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도 한 걸음 내디뎌 보세요


그 한 걸음이 당신을 전혀 다른 곳으로 데려다 줄지도 모른다.


“승진했는데 왜 불안했을까?”


그 질문에, 2년 뒤의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시작이었어.”



『다시, 학교로 간 직장인들』 릴레이 에세이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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