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달릴까?
그렇게 성실한 인성을 지니진 않았지만, 가끔 무언가에 한 번 꽂히면 내 역량은 생각하지도 않고 목표를 향해 나를 밀어붙일 때가 있다. 서울 지하철 5호선 노선도에 적혀있는 모든 명승지에 가본다든지, 절에 가서 삼천 배에 도전한다든지(참고로 둘 다 실패했다).
최근 몇 년 안에 푹 빠진 취미는 달리기. 혼자 조금씩 달리다 우연히 러닝 크루 모임에 참여하게 됐는데, 그날의 내 컨디션은 유난히 좋았고, 달리기 장소였던 반포한강공원의 풍경은 또한 유난히 아름다웠다. 그렇게 달리기를 시작하고 3개월 만에 10키로 대회를, 6개월 만에 하프 마라톤을, 그리고 12개월 만에 풀마라톤을 완주했다.
그렇게 좋은 기록들은 아니었지만, 풀마라톤까지 나아가는 과정은 참 즐거웠고 목표지향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맹목적이었다. 내가 마라톤을 하겠다고 하면 사람들은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 그러게? 왜 그렇게까지 했지? 이왕 달리기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당연히 풀마라톤을 목표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마음가짐으로 막상 마라톤을 완주하고 나니, 기쁨도 잠시 허무한 마음이 밀려왔다. 앞으로는 뭘 더 해야 하나 고민하며 가볍게 달리기를 이어 나가던 중 갑작스럽게 부상을 입었다. 그렇게 무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90키로가 넘는 체중으로 풀 마라톤을 완주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결국 완주한 것은 축하할만한 일이지만, 내 몸에게는 사실상 학대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목표지향적’인 삶을 살아간다.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등의 사회적 기준들을 맞추려 애를 쓰고, 맞추지 못하게 되면 스스로 낙오된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나도 어떻게 보면 풀 마라톤을 완주하지 못한다면 내가 해왔던 달리기들의 의미가 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꾸역꾸역 쥐가 난 다리를 부여잡고 걷기까지 하며 무거운 걸음을 이어갔을까? 그래서 남은 것이 무엇일까?
그런 고민 끝에 이제는 가치 중심의 달리기를 하기로 한다. 일상을 이어 나갈 체력을 기르고 싶으니까, 마음이 건강해지고 싶으니까, 달리기가 재밌으니까 달릴 뿐, 무언가 반드시 거대한 목표가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러다 보면 조금씩 몸이 가벼워지고, 속도가 빨라지고, 조금씩 먼 거리를 뛰다가 자연스럽게 풀 마라톤도 완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과정을 겪어야 결과를 얻을 수 있는데, 결과를 좇다 보니 그 과정의 소중함을 잊어버린 것이다.
요즘은 아주 느린 속도로 천천히 달리기를 즐기고 있다. 그러나 아직 내 삶은 초조하고 바쁘다.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정해놓은 목표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가치관을 갖고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달리기를 하며 고민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