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수프

by vin


집 근처에서 쇼핑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깜빡거리는 보행자 신호를 보고 뛰어갈까 말까 생각하다 느긋하게 다음 신호를 기다리기로 한다. 아무 생각 없이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함께 신호를 기다리던, 몸이 불편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나를 천천히 훑어보더니 말을 건넨다.

"47#@%^*843^*#%&#$^"

내 부족한 독일어 탓이기도 하지만 그의 어눌한 말투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럴 땐 난감하다. 그냥 흘려듣되 무시하는 느낌을 주지는 않아야지 하고 있는데 같은 말을 또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

"47#@%^*843^*#%&#$^"

이상한 할아버지네. 내가 동양인이라 그런가? 아니면 구걸을 하는 건가?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생각에 언짢아지려는 찰나 '수프'라는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알고 보니 내 시장바구니 위로 삐져나온 대파를 보고 '맛있는 수프를 끓여 먹으려고?'하고 물은 것이었다. 난 그제야 미소를 보이며 뒤늦은 대답을 했다.

"네, 따뜻한고 맛있는 수프를 끓이려고요"

"좋지. 겨울엔 따듯한 수프가 최고야. 크리스마스 선물은 다 샀어?"

"크리스마스 선물은 이미 다 준비해놔서 마음이 편하네요. 할아버지는요?"

"난 선물을 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 혼자거든."

"아... 할아버지 자신한테 주는 선물을 사시면 되잖아요."

그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때마침 보행자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고 난 그에게 인사를 남긴 채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응, 자네도."

대파를 넣은 수프를 끓일 때마다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그 할아버지의 외로운 미소가 떠오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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