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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뜰 수 있다는 기쁨, 말을 할 수 없다는 슬픔

by 빈센트

눈을 떴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들려온 건, 영화에서 자주 들었던 "삐-삐-" 하는 의료기기 소리였다. 보이는 건 하얀 천장, 그 위에 갈매기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손과 발을 움직여보았다. 얼어붙은 아이스크림이 따뜻한 공기에 녹아내리듯, 굳어 있던 내 팔다리가 체온을 되찾으며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손이 향한 곳은 '목'이었다. 수술 중 문제가 생겼다면, 의사는 내 목에 숨 쉴 구멍을 냈을 것이다. 만약 손끝으로 그 구멍이 느껴진다면, 그건 좋지 않은 신호였다. 극도로 무거운 긴장 속에서 힘겹게 팔을 들어 목을 더듬었다. 다행히도, 구멍은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늘이 도왔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삶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낀다. 사회적으로 얼마나 성공했든, 돈이 많든 적든, 그런 건 아무 소용 없다. 그 순간 할 수 있는 건 기도 밖에 없다. 살아있다는 것,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목에 구멍이 없음을 확인한 손끝은 그렇게 내게 가장 큰 위안을 주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병실이 아니라 회복실이었다. 산소 호흡기와 의료 기기에 의지한 채, 수술을 막 끝낸 환자들이 누워 있었다. 마치 신생아들이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그들 가운데 나도 있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간호사가 혈압과 맥박을 확인하고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판단했는지, 병상 바퀴를 끌고 나를 병실로 옮기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끌려 병원 복도를 지나는 경험은 묘하다. 의식은 있지만, 몸은 완전히 타인에게 의존된 상태. 나는 그저 스스로 두 발로 서서 이 병원을 걸어 나가고 싶었다. 평범한 일상으로, 아주 평범했던 그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잃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그 일상의 소중함이 비로소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


병실은 조용한 6인실이었다. 2주간 아버지와 동생이 번갈아가며 서울로 올라와 간병을 도와주셨다. 그들의 존재가 말 없이 너무도 큰 힘이 되었다. 가족의 사랑이란, 아플 때 가장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다.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아직 그 하루를 온전히 이해하거나 소화하진 못했다. 다만 나는 작은 용기를 내어 물살에 발을 담갔고, 수많은 사람의 손길과 하늘의 도움으로 다시 숨 쉬며 병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경험을 20년, 30년 뒤에는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만약 건강을 되찾게 된다면, 지금 느끼는 이 생명에 대한 감사함과 살아 있음에 대한 소중함을 또 잊고 살게 될까. 다시 성공과 돈, 명예를 좇으며, 이 마음을 묻고 살게 될까. 수많은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가운데, 나는 스르르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수술을 집도하신 의사 선생님이 병실로 회진을 오셨다. 수술은 총 13시간이나 걸렸다고 하셨다. 보통 환자보다 2배 이상 긴 시간이었다. 목소리를 살리기 위해 성대 신경에 붙은 암세포를 현미경으로 일일이 떼어내시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하셨다. 숨 쉬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당분간 목소리는 안 나올 수 있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나에게 "아~" 소리를 내보라고 하셨고, 나는 힘껏 입을 열었지만 들려온 건 공허한 바람 소리뿐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이비인후과 협진을 통해 회복 방법을 찾아보자고 하셨다. 그 말씀 속에서 나는 다시 한 번 희망을 붙잡았다.


나 하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하다는 마음뿐이었다. 그 감사를 잊지 않고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하는 동시에, 또 한 편으로는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 다시 목소리를 찾을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그렇게 기나긴 투병의 여정은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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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