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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환자 어머님, 암 환자 아들

by 빈센트 Mar 1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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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묘한 긴장감이 스쳤다. 원래 공항은 설렘과 기대가 가득한 곳이었다. 미국으로 떠날 때, 나 스스로에게 약속했었다. '성공한 모습으로, 꿈을 이룬 모습으로 돌아오자.'


그 약속이 현실이 되기도 전에, 암 진단을 안고 이곳에 다시 섰다. 병약함과 무기력함이 온몸을 짓눌렀다.


미국에서의 삶은 그래도 나름 순조로웠다. 나쁜 성적표를 받은 적도 없었고, 교수님들과의 관계도 괜찮았다. 친구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토론하고, 발표 준비에 매달리며, 꿈에 부푼 날들이 있었다. 커리어도 차곡차곡 열심히 잘 쌓아나갔었다.


그런데 이 모든 걸 뒤엎은 건 단 한 장의 진단서였다. 암... 이 단어 하나가 모든 계획을 뒤흔들었다.


가족에게 사실을 알리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 어머니는 나와 같은 갑상선암으로 이미 투병 중이셨다. 어머니의 상황이 더 악화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결국 아버지께만 전화했다. 아버지는 경상도 특유의 무뚝뚝함으로 짧게 대답하셨다.


일단 한국에 들어와라. 들어 와서 얘기하자.


그 담백한 말 속에는 분명 수많은 의미와 감정이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귀국 비행기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수없이 생각했다. '앞으로 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인천에서 부산으로 가는 KTX에 올랐다. 너무나 익숙한 길이었다그러나 오늘은 모든 게 낯설었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여행 얘기로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소소한 행복이 왜 이렇게 멀게만 느껴질까. 왜 더이상 저런 일상의 소소한 행복과 즐거움이 사치스럽게 느껴질까.


부산역에 도착하니 밤 공기가 서늘했다. 택시를 잡아탄 후, 우리 집, 우리 동네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익숙하면서도 왠지 낯선 느낌이었다. 곧 부모님 댁에 도착했다.


아파트 앞에 섰을 때, 손이 떨렸다. 얼마나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는지 모른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이 열렸다. 아버지가 거실 불빛 아래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굳어 있었다.


고생했다. 우리 아들.


그 한 마디에 내 마음이 무너졌다. 그 옆에 서 계시던 어머니는 입술을 깨물다 결국 울음을 터뜨리셨다. 온갖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끓어올랐다. 죄책감, 미안함, 안쓰러움, 그리고 거대한 두려움.


어머니는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나중에 여쭤보니, 어머니는 내가 자신과 똑같은 병에 걸린 것을 ‘본인 탓’이라고 여기셨다고 한다. 그래서 울음이 터지셨다고 한다. 목소리는 떨렸고, 눈물은 쉼 없이 흘렀다. 그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엉엉 울기만 했다.


그날 밤, 집 안 곳곳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방은 예전 그대로였다. 수험생 시절 읽고 공부했던 많은 책들, 벽에 붙어 있는 오래된 사진들. 마치 어제까지 내가 지내던 공간처럼 시간이 멈춰 있었다. 여기가 분명 내 집인데, 묘하게 낯설었다.


내일이면 병원을 가야 한다.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지, 앞으로 어떤 수술이 기다리는지 두렵기만 하다. 그래도 이곳이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최후의 울타리라는 사실이 조금은 안도감을 준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온몸이 긴장으로 뻣뻣했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바로 옆방에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길었던 하루가 끝났다. 일단은.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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