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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판정을 영어로 받다

by 빈센트 Feb 22. 2025

조금 늦은 오후, 미로같이 복잡한 복도와 낯선 안내 표지판을 따라 큰 병원의 진료실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차분한 목소리의 백인 여성 의사는 뜻밖에도 무척 따뜻해 보였다. 이전 병원에서 겪은 퉁명스러운 태도와는 달리, 부드러운 시선으로 차근차근 질문을 던지며 내 얘기에 집중해 주었다.


그녀는 목을 살펴보더니, 초음파 검사를 해보자고 권했다. 젤을 바른 목 위로 초음파 기기가 오르락내리락 움직이자, 속이 왠지 더 불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조금 심한 목감기 정도라고 생각해 온 건데, 뭔가 심상찮은가?' 하는 걱정이 서서히 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음… 보아하니 이건 갑상선암일 가능성이 높네요. 당장 조직검사를 해야 해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얼마 전만 해도 단순 목감기일 거라고 생각하며 진통제와 꿀물을 챙겨 마시던 내가, 이제는 ‘암’이라는 단어와 맞닥뜨리게 될 줄이야. 의사가 권유하는 대로 바로 조직검사를 진행하게 됐다. 초음파 젤이 바른 목 위에 길고 날카로운 주삿바늘을 목구멍 근처로 찔러 넣는 순간,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날 선 통증에 몸이 떨렸다. 하지만 더 큰 고통은, 이 바늘이 가져갈 조직이 암일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조직검사가 끝난 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멍했다. 그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확실하지 않을 거라지만, 의사는 이미 암이라는 단어를 또렷이 입 밖에 냈다. 그 단어를 듣고 정상적인 삶이 가능한 사람이 있을까?


며칠 뒤, 검사 결과가 나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병원을 다시 찾았다. 익숙한 진료실에 다시 들어가 앉았다.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신 익숙하지 않은 의학 용어들 가운데 내 귀에 딱 한 단어만 명확히 꽂혔다. Cancer. Cancer. Cancer.


You have been diagnosed with
thyroid cancer.
I'm sorry.


익숙하지만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 혹시나 내가 잘못 들었을까 싶어 핸드폰 사전을 뒤져봤지만, 결과는 역시 '암' 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갑상선 양 옆에 있는 성대신경 중 하나는 이미 기능이 상실됐고, 남은 하나마저 위험할 수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만약 두 개가 모두 망가지면 숨을 못 쉬어 목에 구멍을 뚫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암 기수로 치면 거의 말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런 큰 수술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가족 곁에서 받는게 좋을 것 같다고 조언해주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 이런 질문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취업 걱정, 학점 걱정, 인간 관계로 고민하던 모든 순간들이 한 순간에 사소한 푸념처럼 느껴졌다. 마치 백사장에서 열심히 모래 성을 거대하게 쌓아 올리고 있었는데 파도가 몰아치며 단숨에 흔적도 없이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드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저, 모든 게 백지 상태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하루 아침에 삶의 문장이 끊겼고, 내일이라는 다음 장이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이 상황을 누구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최소한 다시 숨이라도 제대로 쉴 수 있을지, 가족에게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수많은 물음표가 머릿속을 뒤엉키는 순간.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벌어진 걸까, 온갖 후회와 의문이 한꺼번에 덮쳐왔다.


그날, 낯선 도시 한복판에서 마주한 '암' 이라는 단어는 의심할 여지없이 나의 미래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아픈 목을 가만히 움켜쥔 채, 몸도 마음도 한없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하지만 어느 틈에선가 '그래도 살아야 한다' 라는 미약한 다짐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니니까.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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