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해수욕장에서 정성껏 모래성을 쌓아본 적이 있었다. 모래와 물을 적당히 섞어 차곡차곡 탑을 쌓고, 주변에 해자를 파서 꾸며놓고, 그럴 듯한 성벽까지 두른 뒤에는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파도의 습격으로 그 모든 공들임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휩쓸려 사라진다. 그렇게 튼튼해보이고 견고해 보였던 모래성이지만 모래성일 뿐, 작은 파도 앞에서도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인생 역시 때로는 단단하고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성벽처럼 보이다가도,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을 마주할 수도 있다. 특히 건강 문제의 경우 더더욱 그렇다. 건강은 한 번 무너지면 순식간에 인생의 모든 부분이 영향을 받는다. 그동안 쌓아온 지식과 경험, 꿈꾸던 미래가 하루 아침에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린다.
10대에는 건강에 대한 부분을 의식할 이유조차 없었다. 에너지가 넘치고 몸이 가벼워, 아픈 곳이라곤 달리기 후에 잠시 느껴지는 다리의 피곤함 정도였으니까. 20살을 넘길 무렵에는 그야말로 '피지컬 절정기' 를 맞이한다. 무언가를 밤새워 해도, 조금만 자고 일어나면 금세 회복되곤 했다. 그래서 건강에 대해 부지런히 챙기려 하지 않는 시기이기도 하다. '젊다' 는 안도감에 질병 따윈 남의 일처럼 여기는 나이이다.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암" 이라는 것은 막연히 뉴스나 병원 광고에서나 접할 법한 단어였으니까. 내 나이 스물 다섯, 인생 첫 건강검진이 곧바로 ‘암 판정’으로 이어지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암" 이라는 단어가 내 삶의 현실로 다가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모든 게 연습 경기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와, 내 인생을 한 번에 뒤흔들어 놓았다.
순간, 내가 쌓아둔 모든 인생의 계획들이 모래성을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해 얻은 학벌과 성적, 좋은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바쳤던 시간, 인턴십이나 아르바이트로 쌓은 실무 경험, 앞으로의 커리어를 향한 구체적 청사진, 이런 것들이 한 순간에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구나.
앞으로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인생이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걸까?
하는 암담한 질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어쩔 수 없이 미국 생활은 잠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당장 살기 위해서는 수술이 시급했으니까.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 표를 알아보고, 살아오던 방에서 짐을 빼고, 캐리어 두 개에 간신히 구겨 넣었다. 그동안 뉴욕에서 알고 지낸 많은 친구와 지인들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공항으로 향했다.
난기류로 기체가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막연한 불안과 초조함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앞날이 어둑한 구름 뒤에 완전히 가려진 기분이었다.
복잡한 생각을 잠시 치워두고,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부터 천천히 짚어 나가기로 했다. 가장 먼저, 내 목의 암 덩어리를 없애는 것. 이를 위해 좋은 의사 선생님을 찾아 안전하게 수술을 받는 것. 치료와 회복에 전념하는 것.
어릴 적 내가 만들던 모래성은 파도에 무너졌지만, 그 해수욕장을 떠나기 전까지 몇 번이고 다시 모래를 쌓았던 기억이 남아 있다. 우리 삶도 항상 뜻밖의 파도를 만날 수 있다. 그 파도가 성을 무너뜨려 버릴지라도, 또 다른 모래성을 쌓을 수 있는 기회는 여전히 주어질 것이라 믿는다.
일단은 귀국길에 오른 내가, 조금 더 단단해진 마음가짐으로 새로운 모래성을 쌓게 될 날을 기다리며, 담담히 오늘을 견뎌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