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수를 하고 나니 어제와 똑같은 갈등이 찾아온다.
화장... 할까? 말까?
오늘은 안 하기로 한다. 어차피 약속이라고는 없는 여행자 처지. 하루 종일 쏘다녀 봐야 마주칠 사람도 없다. 나만 괜찮으면 된다. 마침 날씨도 흐리니 로션 하나만 쓱 바르고 나가는 자신감을 뽐내 보....... 그러나!
최근에 겪은 두 번의 쇼크가 번쩍하고 되살아났다.
두 번 다 트램에서였는데, ‘인간’이라는 동족 관계 외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양 청년이 나에게 자리를 양보한 사건이다.
첫 번째는 그럴 수 있다. 내 키의 반 만한 여행가방을 끌고 트램에 올랐을 때인데, 가방을 놓기에 딱 좋은 자리가 보이길래 무조건 자리를 잡고 섰다. 1인용 좌석 옆이었다. 그때 1인용 좌석에 앉아 있던 청년이 나에게 앉으라는 손짓과 함께 일어섰다. 그 경우는 내가 안돼 보여서가 아니라 가방이 컸기 때문이다.(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두 번째는, 그때는 밤거리를 돌아다녀 볼 생각으로 작은 크로스백만 걸고 있었다. 해가 지자 추워져서 호텔에 들어가 옷을 겹겹으로 껴 입고 스카프를 둘둘 감은 채 다시 나왔다. 게다가 바람까지 매워서 모자를 푹 눌러쓰....
그랬었구나!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 쓴 내가 뭔가 힘들고 추레해 보였던 거다. 그렇게 보였던 거다.
10년 전이었다면, 10년만 더 일찍 혼자여행을 나왔더라면 힘들고 추레해 보이진 않았겠지. 오히려 용감하고 당당해 보일 수도 있었겠지. 어쩌다가 이렇게 세월이 가고 이렇게 나이를 먹었담?
그래서...
화장을 한다. 약속도, 우연히 마주칠 아는 사람도 없지만, 거리에는 익명의 인간들이 가득 들어차 있고, 그들이 나를 언제 어떻게 보고 있을지 모르니까.
그러나 화장을 한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화장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데다가 내 눈에나 좀 나아보일 뿐, 다른 사람 눈에는 오십 보 백 보일 게 뻔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남의 눈에 당당하고 힘차 보일까?
그 순간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다. 요즘 재미있게 보고 있는 영국 드라마 속의 여자다. .
그는 젊거나, 예쁘거나, 몸매가 좋진 않지만, 딱 봐도, 누가 봐도, 말도 못하게 당당하고 멋지다. 대체 어떤 요소가 그 여자를 그런 캐릭터로 만들어 줄까? (물론 돈이 엄청나게 많지만 그건 딱 봐서 보이는 게 아니니까) 그 여자를 생각함과 동시에 떠오른 이미지는 꼿꼿하게 편 허리와 어깨.
그렇다! 자세가 중요했던 거다. 화장보다도, 비싼 장신구보다도, 돋보이는 건 그 자세였다.
화장은 화장대로 열심히 하고, 허리와 어깨를 쭉 편 채 거리로 나선다.
그러나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거울에 비친 나를 보니 어제와 전혀 달라진 게 없다. 그렇지 뭐. 버릇이 하루아침에 고쳐지려고? 그래도 어제보다는 단 1분이라도 더 허리를 꼿꼿하게 폈겠지
인간은 하루 아침에 달라지지 않는다. 매일 아주 쪼금씩, 세포 조직의 일부분씩 달라지다 보면 언젠가는 외모든 내면이든, 아주 조금이나마 나아진 나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