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의 커피는 유독 달았다
H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 문에서 올 거라는 예상에 괜시리 그쪽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돌아볼 틈 없이 뒷 쪽에서 인사를 건넸다. 가장 눈에 띈 인상은 서글서글한 눈매였다. 어떤 말이라도 꺼내야 할 것 같아 대뜸 “눈이 정말 크시네요.”라고 건넸다.
성과 이름의 조합이 특이한 H의 이름을 듣고는, '성이 특이한 것도 아니고, 이름이 특이한 것도 아닌데 저렇게 붙여있으니까 신기하네.'라고 생각했다. 설디선 그 이름을 혀로 내뱉기 위해 두어 번 되새기고 나서야, 비로소 OO 씨,라고 할 수 있었다. 생경한 그 이의 이름은 마르지 않은 잉크 자국처럼, 그 해 가을의 초입 속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낯선 단어였다.
이어진 대화는 술술 풀리다 못해 이리도 순탄할까 싶을 정도로, 그 날 당장 연인이 되어도 이상할 법 없는 기류를 타고 있었다. H는 “소영씨랑 나, 우리 잘 맞는 것 같지 않아요?”라고 했다. 나는 그간의 두려움을 꺼내며 말했다. “첫 만남에 잘될 거라는 확신이나, 이 사람이 좋아지게 될 거라는 예상은 소름 끼치게 적중하는 경우가 많아서 오히려 망설이게 돼요. 정수리가 쭈뼛 서게 될 정도의, 짜릿함을 주는 설렘들이 더러 큰 실망으로 이어지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젠 살 떨리는 설렘보다는, 그 설렘을 온건하게 유지할 수 있는 안정감을 바라게 되었어요."
수줍음 탓에 혀가 바싹 말라 몇 번 빤 아메리카노는 금방 바닥을 드러내기 일수였다. "물 좀 더 채워올게요"라는 말조차 꺼내기 부끄러워 녹은 얼음을 연신 빨아재꼈다. 쓰디쓴 아메리카노는 설탕 두어 스푼을 넣은 것 마냥 왜 이리 달게 느껴졌는지. 시작은 늘 이상하리만큼 순탄했고, 그 날의 저녁 식사나 커피는 달디달았다. 그렇게 사랑은 시작되었다. 문제는 시작에서 꼬이는 법 보다, 관계를 이어나가는 지속이 어려웠다. 쉽게 기웠던 단추는 금방 헐거워져 실밥에 삐져나온 채 간신히 매달기 일쑤였다. 이럴 거면 시작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텐데, 라는 후회는 첫 커피의 단내와 마음속 쓰림을 맞바꾼 격이었다.
H는 얘기했다. “알랭드 보통 소설에는 이별의 아픔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주인공이 나와요. 작가는 이 대목에서 이별의 고통이 힘들어도 다가올 사랑을 위한 마음을 남겨둬야 한다네요.”
다가올 이를 위하여 여분의 마음을 남겨 놓는 일. 이번에는 이 정도만 사랑해야지, 마음먹은 만큼의 사랑의 적정 온도가 있을까. 사랑에도 다가올 상처를 가늠할만한 적정량과 방침이 있으면 좋으련만, 한번 누구를 좋아하게 되면 그 이의 A부터 Z, A의 세부항목, 품번 번호까지 매길 정도로 구체적으로 사랑하게 되어버려 사랑이 늘 버겁게 느껴진다. 애정의 대상은 소유욕을 불러오고, 과욕은 불안이 되어 상대에게 다툼과 피로를 안겨주었다.
H는 좋았다. 하지만 섣불리 사랑했다가, 적정 온도라는 것을 또 넘겨버려 마음을 까맣게 태워버릴 내가 보였다. 자잘한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하며 인연을 이어가는 것에 기대를 저버렸다.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버려서 누군가를 사랑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것에 그다지 감흥이 없어졌다. 가을바람이 차다. 다가오는 인연은 한기를 몰고 올까, 잠깐 동안의 따스함과 ‘아 이별이 이렇게 쉬웠던가’ 하는 한숨을 맞바꾼 채 사라져 버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