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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떼엉 May 25. 2020

그 이의 맥락

내면에 읊조리는 속내


만일 네가 죽지 않았다면, 독일로 돌아가 널 다시 만날 때 난 네 얼굴을 만져야 했을까.  내 손으로 이마를, 눈꺼풀을, 콧날을, 뺨과 턱과 주름들을 읽어야 했을까.  
<한강, 희랍어 시간 중>



타인의 서사

그 이의 줄거리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꽤 지난 겨울, 강남역으로 가는 지하철 안 입구에 서 있을 때였다. 건너편에 서있는 남자가 헤드폰을 낀 채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는 점점 커지고, 조용한 실내 속 퍼지는 소음에 그를 쳐다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급기야 남자는 박수를 치며 몸짓을 크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위협감에 조심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지하철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그제서야 다급하게 남자의 행색을 살폈는데 눈에 들어온 건, 몸이 불편한 사람임을 고지하는 등록증이었다.


다음 역은 강남역, 지하철에 내리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아 내가 실수를 한 걸지도 모르겠구나.’ 불안감을 빌미로 몸이 불편할 거라는 물증을 찾았던 것이다. 또 다른 애석함은, 비롯된 그의 행동으로 받게 될 시선을 대비해 걸어둔 누군가의 걱정 어린 염두였다. 얼굴을 따라가다 자연스럽게 목 언저리와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이가 처한 무수한 상황과, 이를 연결 짓는 세세한 맥락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줄곧 하나의 행동만을 보고 타인을 평가하곤 한다. 목소리가 크고 몸짓을 크게 휘두른다는 이유로 '다소 이상한 사람'으로 판단했던 것은 행동의 결과만을 보았던  과오였다. 그 이의 행동에는 몸이 불편해 타인에게 불쾌함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고지해야 하는 맥락의 당위가 존재했다.


한강의 <희랍어 시간> 대목 중, 눈이 멀어가는 남자와 그를 사랑했던 연인이 등장한다. 남자의 시점으로는 눈이 보이지 않기에 얼굴을 더듬어 연인의 표정을 읽어야 했다. 눈이 멀어가는 남자의 상황에 대입하자, '얼굴을 더듬어 읽는' 그 이의 맥락을 읽게 되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말처럼, 그 이의 내면 속에서 읊조리고 있는 속내는 그 자신만이 아는 법이다. 더욱이나 누군가의 아픔이나 슬픔은 쉽게 간과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타인이라는 무수한 서사 속, 헤아리지 못한 아픔의 깊이는 쉽게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무지하고 또 무지해서 타인을 오독한다.  



@오사카, 미나토모토마치역

여전히 무지하고 무지해서

타인을 오독한다





문체적 삶, 방떼엉 

/@vingt_et_un____

@soyeongb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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