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던 장면에 내가 있었네
연서가 아무래도 컨디션이 왔다 갔다 하여 처음으로 학교를 빠지고 오늘은 내 엄마아빠와 내 딸과 이렇게 4명 조합으로 보내보려고 한다.
베트남 오고, 며칠을 강행군으로 놀았으니 오늘은 조금 쉬어가며 숨을 고르기로 하였다.
일단 연서는 딱히 질병은 아닌데, 계속 쳐지는 상태라 빠른 회복을 위해 병원에 가서 링거를 하나 맞기로 했다. 이왕 연서가 맞는 김에 아빠엄마도 영양수액 하나씩 맞기로 해서, 셋이서 나란히 누워 링거를 맞으며 시작하는 일정. 너무 놀고 더 너무 놀기 위해 이렇게 의기투합해서 영양제까지 맞는 거 좀 웃기네?
여하튼 한 시간 투여한 영양수액 덕택인지 아빠의 눈이 초롱해지고 연서가 갑자기 텐션이 오르는 게 느껴진다. 갑자기 텐션 오른 세 사람. 다음코스는 콩카페로 모셔드린다.
사실은 내가 코코넛커피가 먹고 싶어 간 거였는데, 아빠가 생각보다 너무 잘 마셔서 놀랐다. 달달하니 맛이 없을 리 없지. 아빠는 평생 자기가 이런커피를 좋아하는지 모르고 살았겠구나, 싶으니 좀 미안하네.
콩카페의 컵이 예뻐서 기념품으로 샀단 내 말에 엄마눈이 갑자기 번뜩 떠졌다.
"그 거시 뭐 유명하대? 그믄 나도 사가까?"
아들 만나러 베트남 간다고 성당사람에게 자랑을 한 건지, 엄마는 한국에 돌아갈 때 선물을 30개 정도 사가야 한단다.여기저기 잘 다녀오라고 받은 용돈들 보답은 해야 할 것 아니냐고..
마침 뭘 사야 하나, 말도안 통하고 답답하던 찰나에 내 말이 엄마에게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엄마는 그날, 그 콩카페의 모든 컵을 다 사 왔다. 담아갈 가방이 없어 에코백까지 덤으로.. 그때는 몰랐다. 엄마의 쇼핑의 시작일 뿐이었다는 걸..
며칠 쌀국수를 주식처럼 먹었던 엄마아빠를 위해 점심은 한국식당에서 야무지게 한 뚝배기 한 후, 다음코스는 네일숍이었다.
호찌민물가가 다 싸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네일숍 가격이 은혜롭다. 한국에서는 4-5만 원 하는 젤 네일이 여기서는 만원~만오천 원 시세. 평소에 한국에서도 잘 안 하는 네일이지만, 왜인지 이곳에서는 안 하면 손해인 것 같아 하게 되는 그런 호찌민 관광상품 중 하나. 우리 엄마와 내 딸을 위해 선택한 코스였다.
아빠도 혼자 기다리게 두기 미안해서 발각질제거를 해보기로 했다. 평소라면 "그런 거 슨 안 해~ 머더러 남자가 그런거슬 한대~" 했을 아빠인데 여행에 오니 좀 마음이 열린 건지 선뜻 오케이를 했다.
그렇게 10살 내 딸과 70살 울 아빠가 나란히 앉아 관리를 받고 있는 이 씬이 너무 재밌다. 아니 아빠랑 네일샵이라니..한국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장면 아니겠는가. 어디 구찌터널 같은 대단한 여행지를 가지 않아도 이 비일상적인 곳에서 일상처럼 보내고 있는 장면하나하나가 나는 더 여행 같고 새롭다.
한평생 이런 네일아트는 안 해봤다며 너무 화려하면 싫을 것 같다던 엄마는 펄까지 추가해달라며 급발진을 했다.ㅎ 내가 "이때가 아니면 언제 해보리" 병이 있는데, 이게 다 우리 엄마 유전자 였구나. 내친김에 페디도하겠다며 최대한 빨갛고 화려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우리 엄마. 언제는 화려한 거 싫다면서요??
엄마, 아빠, 내 딸과 나, 중간에 합류한 올케까지 이 이상한 조합이 다 같이 네일숍에서 관리를 받고 있는 걸 보니 오늘 한 달 살기의 매력을 하나 더 찾아냈다.만약 우리가 큰돈 들여 다 같이 6박 7일 호찌민 여행 왔으면 짧은 일정에 다 보고 가려고 아마 숙소 + 관광지만 돌아다녔을 것 같은데, 내가 잠시나마 살고 있는 상황에서 엄마아빠가 오니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익숙하게 이런 시간들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냥 여기사는 딸, 아들 만나러 온 엄마처럼 무리 없는 일정으로 지내며, 소소한 일상 같은 순간들을 같이 누리는 여행 아닌 여행 같은 기분.프랑스에 에펠탑앞 단체사진보단 골목모퉁이에서 먹는 크라상과 에스프레소가 더 여행스러운거처럼.
누가 한 달 살기 가면, 가있는 동안 누군가를 꼬셔서(?)초대하라고 권유해야겠다. 친구나 가족이랑 다 같이 시간 맞추고, 비용 나누고 한꺼번에 여행 가는 건 어려워도 누구하나 한 달 정도 어딘가에서 짱박고 있으면 한달안에 아무때나 오갈 수 있고, 같이 온 듯 따로 온 듯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니. 한달살기+여행까지 덤이 가능.
한나절 우리 넷이서 한량놀이를 하고 나니, 준서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왔다. 엄마아빠는 처음 가보는 우리 숙소 수영장으로 가서 남은 시간도 충실히 한량놀이를했다. 달이 뜨는 물놀이터에서 가족들과 수영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 같다 싶었는데-
아,생각해 보니 내가 오래도록 꿈꾸던 장면이었다.
코로나가 시작될 때쯤부터 ‘언제쯤 해외여행을 갈 수 있을까? 어디 동남아에 한 달 동안 집 얻고 지내면서 가족들도 초대하고 같이 여행도 하고 그럼 참 좋겠다- 동남아는 물가 저렴하니까 한 달 정도 살아도 크게 비싸진 않겠지? 아 이왕이면 애들도 거기에 있는 영어학교 같은데도 보내야지. 그래서 한국에서는 다 같이 모이긴 힘들어도 여행 가서 한 번쯤은 다 같이 여행도 하고 그럼 참 좋겠네.’
그렇게 상상하고 꿈꿔왔던 그림- 지금 이 순간이
내가 오래도록 그려왔던 그 장면이었음을, 문득 깨달았다.
내가 호찌민에서 오면서 남동생에게 엄마아빠도 초대하자고 제안했던 건, 아마 그 오랜 그림이 무의식에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문득 번뜩했던 아이디어도 아니었던 것 같고, 그저 좋은 기회여서 제안했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아마 오래도록 그려온 장면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이루고 싶었던 거 같다.
오래 걸렸고, 상상이랑은 좀 다르지만(?) ㅎㅎ 꿈은 이루어졌다. 수영장이 있는 숙소를 빌려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하고 싶다던 입버릇 같던 그 장면이 오늘 여기 있다.
숙소로 돌아와 다 같이 쪼르르 앉아, 베트남 자막이 나오는 "리틀포레스트"를 보며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나누는 네 사람을 보며 한번 더 믿어보기로 했다.
원하고 바라면, 이루어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