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 없이는 낭만을 만들 수 없지
속 을 다 게워낸 연서는 컨디션의 업다운이 반복되는 것 같았다. 모든 일정이나 다른 계획들은 무리인 듯하여 저녁을 먹고 서둘러 호텔로 향했다. 쉬고 싶다는 연서를 침대에 재우고 나머지 가족들은 호텔에서 제공하는 마사지를 받으러 가거나 맥주를 마시면서 다들 하루를 서둘러 정리했다. 부모님은 나이가 많아 피곤하고, 우리는 어제 달려서 피곤하고, 연서는 아프고. 다들 밤이 되니 급하게 방전 되는중.
그와중에 마법까지 터져버린 나는 근처에 약국도 찾아볼겸 생리대를 살겸 호텔 앞을 준서와 함께 한바퀴 돌았다. 여행중에 준서한테는 어째 신경을 많이 못쓰고 있는거같아 이때 잠깐이라도 준서랑 데이트를 할 요량으로. 그런 엄마의 마음도 모르고 그저 한국시세와 베트남 시세를 가장 정확하게 비교가능한 편의점에서 자꾸 싸다는이유로 간식거리를 한가득 집는게 영 내키지않지만, 그 낭만 내가 뺏을수 없지. 그려 그려- 준서는 이거저거 동생이 좋아할 간식까지 편의점 돈쭐을 내고, 나는 생리대를 고르는데 이거참, 그간의 쇼핑보다 난이도가 높구나. 대체 뭐가 좋은지 하나도 모르겠네. 그와중에 cool이라고 써진 게 그나마 쾌적해보여서 골랐는데, 알고보니 멘솔이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소감은....맵습니다. 베트남에서 쿨..써진 생리대 사지마세요ㅋ.
호텔앞 커피집에 잠시 앉아, 준서는 아이스크림, 나는 커피한잔을 시켜 하루종일 긴장했던 마음을 내려놓았다. 방에서는 셋다 잠들어있어 여기서 좀 더 있다가 들어가자 준서야. 하며 둘이서 잠시 노상에서 멍을때렸다. 이제 베트남 스타일 이 목욕탕 의자가 너무 익숙해서, 문득 현지인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 여기서 외국인 맞지?ㅎ
호텔로 돌아와 보니 연서는 좀 불편해보이지만 그래도 계속 잘 자고 있었다. 근처에 약국도 없어 약도 못사왔는데, 고열은 아니어도 미열이 살짝 있는 게 영 맘이 걸렸다. 혹시나 호텔 프론트에 비상약이 있는지 물어봤지만 호텔에서는 약을 제공해 줄 수 없다고 한다. 원한다면 근처에 있는 닥터를 호출해서 방문진료요청할 수 있다는데, 의사를 부를 만큼 심각한 정도도 아닌지라 연서가 조금이라도 깨는듯 싶으면 일단 물을 먹이면서 상태를 지켜보았다. 타이레놀 한 알 정도면 연서가 푹 밤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다른 약은 챙기면서 왜 타이레놀은 안 챙겨 왔을까. 후회와 미안함이 마구 밀려왔다.
그러다 문득, 도라에몽가방처럼 뒤지면 뭐든 나오는 엄마의 마법 가방이 생각났다. 옷장 한편을 영양보조제와 각종 약들로 채우고 사는 건강염려증인 엄마에게 분명 해열진통제가 있을 것 같았다. 잠든 엄마를 깨워 가지고 온 약을 꺼내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꽁꽁 숨겨있던 타이레놀 두 알. 이 타이레놀이 이렇게 가까운데 있었을 줄이야. 그리고 이렇게나 반갑고 귀하게 보일줄이야.
반알로 쪼개 자는 연서를 잠시 깨워 먹이고 다시 재워본다. 이내 얼마 안 되어서 연서의 숨소리가 편안해지는 게 느껴진다. 다음부턴 내가 진짜, 여행 올 때 타이레놀은 박스로 챙겨 온다 진짜..(그리고 똑같은 후회를 또 하게 되는 사건이.. 나중에.. 또 생겨났다)
다행히 연서는 그 후로 푹잤고, 열도 내렸다. 종종 깨긴 했지만 그래도 나도 조금 안심이 되었던지 평소보다 늦게까지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너도 나도, 이제 좀 살겠다 그지?
아침 일찌감치 산책을 다녀온 아빠와 (아빠는 어딜 가든 새벽에 동네 산책을 간다) 아침부터 묵주기도를 하는 엄마는 우리가 일어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조식! 그래 호텔에 왔으면 조식을 먹어야지!!
일단은 어제부터 거의 먹질 못하는 연서를 먹여야 할 것 같았다. 수프와 국물, 과일 등을 떠 나르며 한입이라도 먹어보려고 했다. 차려주는 것 이외엔 먹는 것에 관하여는 절대적으로 스스로 하도록 하는 엄마이지만, 오늘만큼은 누운 입에 죽한숟가락이라도 먹여야만 할 것 같았다. 조식이 나름 깔끔하고 괜찮았던거 같은데 나는 그냥 커피 두 잔으로 족했다. 입맛이 여전히 없는 연서가 동분서주하며 이거 저거 떠다 먹이려는 엄마가 불쌍했는지 그래도 좀 먹어주었고 그러더니 어제보다는 조금 더 초롱해진 눈으로 돌아와 주었다.
(훗날 베트남 다녀온걸 일기로 써서 학교에 내는데, 연서는 그날의 엄마가 제일 인상 깊었다고 한다. 자기가 아플 때 이토록 한없이 애쓰는 엄마한테 고마웠다며.. 응..?? 평소에.. 엄마가.. 그렇게 차가왔니..ㅋㅋㅋ)
붕따우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예수상이 있다고 한다. 올라가는 계단이 어마어마하다는데 절실한 가톨릭 신자인 엄마는 믿음 앞에서는 무릎관절도(몇 년 전 인공관절 수술을 했는데) 자신감이 생기는지, 다녀오겠다 하여 컨디션이 안 좋은 연서와 나를 빼고 나머지 가족들은 예수상에 다녀왔다. 계단이 어마어마한 줄도 모르고 엉겁결에 삼촌과 외할머니 따라나섰던 준서가 그래도 마지막 예수상 끝까지 외할머니가 올라가 주었다고 한다. 외할머니랑 준서만 예수상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일렁였다. 나나 남동생은 아니 우리 가족은 늘 엄마의 종교활동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아서 늘 엄마가 섭섭해했는데, 엄마 키만큼이나 커버린 손주가 손잡고 같이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예수님 만나러 같이 올라가 주었으니- 실은 꽤나 중요하고 큰 효도를 대신해주는 것 같았달까. 나랑 갔다면 분명 귀찮다, 힘들다 했을 텐데 분명 그날, 그곳을 같이 올라가 줄 사람이 자기뿐이었단 걸 준서가 알아준 것 같아서. 다 큰 것 같아서 고마웠다.
체크아웃 전 나는 못쓸뻔했던 마사지 쿠폰을 겨우 쓰고 나서 다 같이 근처 해변으로 갔다.
이번에도 더위에 힘들어질까 봐 연서와 나는 근처 다른 호텔 로비에서 졸았(?)고, 다른 가족들만 바다구경을 실컷 하고 왔다고 한다. 게도 잡고 그랬다고- 한여름낮에 바다를 보고온 가족들의 얼굴에 지침이 가득한데, "나가 언제 또 와보겠냐 여기를~" 하며 어디 하나 안 놓치고 가보려는 엄마의 체력이 우리 중에서 제일 좋아 보인다.
붕따우 떠나기 전 한국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한국관: https://maps.app.goo.gl/VWSCWpcpGYXRFsQS7?g_st=com.iwilab.KakaoTalk.Share ) 이런 베트남 시골에도 한국식당이 있는데서 한번 놀랐고, 회도 팔고(진짜??), 짜장면도 팔고 냉면도 팔고 떡볶이도 팔고 제육도 파는 이 중심 없는 메뉴에 한번 더 놀랐다. 떡볶이 좋아하는 우리 준서는 타협 따위 없이 자신의 메뉴를 시킬 수 있어서 행복해했고, 오랜만에 만난 떡볶이에 반가웠는지 급기야는 떡볶이 국물에 밥을 말아먹었다고 한다. 에라이
서서히 체력을 회복하는 연서도 밥을 먹으면서 조금씩 살아났다.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인데, 나름 호찌민에서 동남아 st여행을 왔는데 하나도 못 즐기고 가게 되어서 너무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이만하길, 이 정도로 아프고 지나가서 다행이다 싶고.
배도 불렀겠다, 연휴 마지막이라 차도 막히겠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모두 꿀잠을 자고 돌아오니 어느덧 밤이 되었다. 오는 길에 미리 약국에 요청해서 조제해 둔 연서약을 약국에서 찾고 오니 이제야 긴장감이 확 풀렸다.드디어 약이 있다.연서야, 엄마가 약을 구했어.드디어!
이틀동안 연서의 컨디션에 조마조마하며 다녀온 여행이지만, 내딸말고 내 부모님을 생각하면 그래도 태어나 한 번도 동남아를 가본 적 없는 엄마아빠에게 동남아식 바이브여행을 시켜줄 수 있어서, 뿌듯했다.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예수님을 대따시만 한 동상으로 보고 왔으니 엄마에게 큰 자랑거리 하나 만들어준 것도, 울아버지는 잔소리하는 마누라 차단해 주는 딸덕에 대낮부터 바다 보며 원 없이 맥주를 마신 것도 분명 행복하셨으리라. 그리고 이렇게 놀았어도 여전히 일주일은 더 여행할 시간이 남은 것도-
추억은 장면으로 남는다. 비록 연서가 아팠고 종종 힘들었지만 결국 아름다웠던 순간들로 기억될 것이다.
로운이랑 준서랑 껴안는 장면, 할머니랑 연서랑 수다 떠는 장면, 기웅이 부부가 손잡고 걷는 장면, 올케가 아빠 앞에 그릇을 놔주는 장면 같은 다정한 순간, 노을이 지던 식당의 석양, 아침에 커튼을 젖혔을 때 보였단 바다의 순간 같은 기억들이 낭만으로 기억될 것이다.
가기 전에 했던 많은 고민들이 다녀와보니, 그래도 하길, 가길, 사길 잘했다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밤.
누군가 그러더라, 낭비 없이는 낭만을 만들 수 없다고-
엄마아빠와 있는 동안만큼은 적극적으로 낭비하며, 낭만을 더 만들어 보내줘야겠다고 맘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