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BYE 2022
한바탕 대가족과 우당당탕 하루를 마감하고, 숙소로 돌아와 아이들을 재우고 아빠와 맥주 한잔을 하고 있는데 동생에게서 카톡이 온다. "맥주 마시러 갈 사람?"그 카톡에 그래봐야 나랑 올케 남동생, 이렇게 3명인데 말이야.
처음엔 이 타국에서 엄마아빠, 내 아들 딸 놓고 혼자 밤에 나간다는 게 좀 걱정스러워서 너희끼리 잘 다녀오라고 보내놓고는, 생각해 보니 이 기회가 아니면 내가 언제 호찌민에 밤에 혼자 나가 놀아보겠나 싶었다. 한국에서도 잘 쓰기 힘든 엄마아빠 찬스인데.. 게다가 오늘은 2022년 마지막날. 카운트다운을 해야 하는 날 아니겠는가.
답장을 보내놓고 살짝 흔들리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남동생이 한번 더 꼬셔(?) 주었다. 어디야, 누나가 지금 간다.
동생네 집 근처에 있는 작은 펍에서 셋이 다시 만났다. 내가 분명 여간한 동네 가게들은 다 봤는데 이 집은 밤에만 열어서 그런지 처음 보는 느낌. 우리 빼고는 다 외국인(물론 우리도 여기선 외국인이지만)인 동네의 외국인 사랑방 같은 곳 같았다. 시끌시끌 펍에 오니 그렇게 피곤했는데 묘하게 또 신이 났다. 애들도 없고, 엄마아빠도 없고- 나름 이번여행 기획조&운영조인 우리끼리 어덜트타임을 가져보자!
맥주를 시켰는데, 이 놈의 나라는 뭐든 후하네. 얼굴보다 더 큰 생맥주를 가져다준다. 내 어디 가서 맥주 한잔만 먹는 사람은 아닌데 여기 맥주는 이미 한잔 먹고 화장실을 3번이나 가게 만들 만큼 양이 많았다. 수다 떨며 맥주 한잔 겨우 다 마시고 안 되겠다 싶어 와인으로 마시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여간한 식당에서 제일 저렴한 와인 시켜도 5만 원대가 기본인데 여긴 2만 원대이 기본이네.. 우린 마트에서도 데일리와인이 2만 원이잖아?
아 내가 여기 와서 나이트라이프를 안 즐겨봐서 몰랐는데, 베트남은 술 먹기도 너무 좋은 나라구나. 술도 싸고 안주도 싸고!! 이런 동네 술집이 수지 우리 집 앞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와인 한 병과 나쵸를 시켜서 셋이서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는 고생하는 남동생을 위한 나와 올케의 응원과 위로이기도 했었고, 둘만 느꼈던 베트남살이에 대해서 나도 이제 공감하는 부분들, 에피소드들을 이야기 기하다 보니 시간이 쭉쭉 갔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셋만 만나서 이야기해본 적도 처음인 것 같고 늘 아이들이 껴있거나 했기 때문에 친밀하게 어른들만의 시간을 보낼만한 기회가 없었는데 호찌민에서 와서야 이렇게 셋이서 술을 한잔 해본다. 가족이라는 게 모여있을 땐 가족이지만 결국엔 다 각자의 개인이 아니겠는가. 한 사람과 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피고 지는 마음은 누나와 남동생이 다르고, 언니와 여동생이 다르고, 올케와 시누이가 다 다르니. 다 모였다고 가족이 아니라, 이런 조합, 저런 조합으로 다르게 만나며 뭉치고 다듬어지는 게 실은 진짜 가족의 관계일 테지. 그 관계의 조합을 가족이라 부르는 것일 테고. 호찌민에 와서 내 아이들, 나의 남동생, 나의 부모. 이렇게 여러 조합의 관계가 다르게 분리되었다가 재조립되는 이 과정이 즐겁다. 오래도록 한국에서도 못한 많은 일들이 이곳에서 벌어지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한참 마시고 있는데, 옆에 사람들이 갑자기 12시가 다된다며 카운트다운을 하잔다. 가게에 있던 사람들 모두 마시던 술을 한잔씩 들고 나와 다 같이 카운트다운을 했다.
10,9,8,7,6,5,4,3,2,1
HAPPY NEW YEAR!
아이들 낳고 난 이후로는, 사실 해가 바뀌는 매년 12월 31일도 늘 일상처럼 보냈던 것 같다. 10시면 아이들을 재워야 했고 녹초가 되어 늘 꾸벅꾸벅 졸다가 신년행사니 새해 첫 해돋이니 같은 행사는 늘 나중에 뉴스사진으로나 보는 남의 이벤트 같았다.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맞이하고 무언가 구분 짓기엔 내 일상이 늘 너무 같았으니까.
그러다 오늘, 여기 이곳에서 아이들은 할머니할아버지랑 잠들고, 나는 홀가분하게 나와 맥주며 와인이며 흥 있고 취기도 오르고 반팔티를 입는 더운 나라 펍에서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는 이 오랜만이고, 신나는 송년/신년 이벤트를 보내고 있으니 존버의 승리같기도 하고, 신난다이상의 뿌듯함 같은 게 오른다. 이제 좀 나 다시 신나는 인생 살아도 되는 건가. 싶고-
내일이면 다 같이 붕타우로 1박 2일 여행을 가기로 되어있고, 12시가 지나며 피곤이 극에 달했지만 이미 차오른 신남이 가라앉지 않으니 동생이 그럼 2차를 가자며 앞장을 섰다. 그래 내일의 피곤은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셋이서 푸미흥의 번화가 골목의 펍으로 갔다. 이름도 나이브하게 NIGHT BAR!
쿵덕쿵쩍, 우퍼에서 나오는 굵직한 비트소리와 조명, 우왕 오랜만이다. 내 비록 두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지만 아직은 이런 거에 신이가 난다고! 절로 들썩여지는 어깨, 리듬 타는 얼굴. 올케 앞에 너무 신난 시누이라 좀 민망 도한데- 나 오늘만 좀 신날게. 이해해 줘!
셋이서 무슨 대화를 얼마나 더했는지 뭐 딱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취했다기보다는 그냥 분위기가 정신없었지만 그냥 그렇게 쓸데없이, 어떤 눈치나 긴장 없이 밤을 같이 보내는 사이가 있다는 건 좋은 거 아니겠는가. 그냥 하릴없이 하하하 웃었다가, 신랄하게 누군가를 욕했다가, 밤새도록 취해도 좋을 밤이었다.
피곤할 텐데 누나 신나라고 계속 분위기 살려주는 동생도, 그런 동생을 이해해 주고 까부는 시누이 구경해 주는 올케도 다 마음이 너무 이뻐서, 황홀한 밤이었다. 너희 아니었으면 나 여기 못 왔었어. 고마워.
계속계속 신이 났지만 자꾸 신이 나니 겁이 불쑥 났다. 신데렐라 타임을 넘겨도 한참 넘겼지 아마. 결국 제풀에 먼저 집에 가자고 한건 나였던 거 같다. 우리는 또 내일 챙겨야 할 부모가 있고, 부모인 사람이니까.
집에 가는데 나도 모르게 덩실덩실 길에서 춤을 추고야 만다. 오늘 너무 잘 놀고 들어간다 동생아.
몇 년 못했던 음주가무의 갈증을 싹 채우고 가는 기분이야. 2023년에는 내내 이렇게 신나면 좋겠다. 그지?
그나저나 나 아까, 안 나온다고 했던 사람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