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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g Mar 07. 2023

[호찌민 한 달 살기]42024,사이공이사

반짝반짝

2주간의 남동생 집 빈대살이를 청산하고 이사를 하는 날이다.

사실 이사랄 것도 없는 게, 캐리어 2개가 내 짐의 전부이니 아이들 학교를 보낸 후 2주 동안 펼쳐놓았던 갖가지 짐들을 다시 회수하는 정도의 노동. 옷들은 심지어 캐리어를 펼쳐놓은 채 지냈기 때문에, 그저 가지런히 정리하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아이 둘에 어른하나, 이 세 명이 2주를 지내는데도 이 이 캐리어 두 개로 부족함이 없었다. 지난 10년간 6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정말 이사라면 넌덜머리가 난 나는, 이 단출함이 너무 좋다. 앞으로도 이사를 해야 한다면 딱 이 정도이면 얼마나 좋을까.


후다닥 짐을 싸고, 이제 아마도? 살일 없는 이 동네를 또 한 바퀴 둘러본다. 2주간 거의 격일로 가던 카페에 갔다. 여전히 중저음 미소로 반겨주는 아르바이트생과 시답잖은 아침인사를 건네고, 에스프레소 한잔을 시켜 잠시 넋 놓고 앉아본다. 에스프레소도 너무 맛있네 이 치명적인 나라는. 겨우 2주 지만, 내가 단골로 삼았던 카페가 있다는 것은 참 운이 좋았다. 이 카페가 종종 진짜로 내가 이곳에 "살러" 왔다는 것을 실감케 해 주었다.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서 어떤 풍경에 익숙해지고, 풍경이 기억에 축적되는 이 환희. 마지막으로 그 장면과 그 풍경을 또 한 번 눈에 새기고, 호찌민 어느 동네에 단골카페가 있었다는 것을 내내 추억으로 삼고 살아야지.


새로 갈 숙소에 2시 이후나 들어올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아서, 점심도 이 동네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이제 오늘 밤이면 엄마아빠도 호찌민으로 올예정이라 진짜로 마지막으로 먹는 혼점. 집 앞에 맛있는 쌀국숫집을 갈까 하다 그래도 마지막 혼점이니 괜한 사치를 부려보고 싶어  새로 생긴듯한 초밥집으로 갔다. 딱 봐도 한국식 초밥집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주인도 메뉴도 모두 한국이네..

런치 세트와 하이볼 하나를 시켜서 혼자만의 점심을 만끽해 본다. 남동생이 뭐 맨날 이런저런 의미 부여하며 혼자 잘 먹고 다닌다고 비아냥 거리는 카톡에 킥킥대며 답장을 하고, 아무렴 어때. 나는 그러려고 온 관광객 아니겠니? 그러나 진심으로 축복하고 싶었다. 지난 2주간, 아이들을 학교 보낸 후 매일 8시간씩 혼자 여행하던 시간들. 더없이 자유롭고 내 본진을 찾아가는 것 같던 사유의 시간들. 감사했고 의미 있던 시간들이 너무 즐거웠다. 코로나를 겪으며 내내 혼자 어디 외국여행 한 2박 3일만 해보고 싶단 말을 입에 달고 다녔는데, 혼자 온 여행이 아니었음에도 혼자온 여행처럼 낮시간을 보내는 여행자였다가 저녁이면 보호자가 되는 이 낮/밤모드가 있는 2주의 생활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러니 어찌 맨입으로 점심을 먹을 수 있겠는가, 혼자지만 시원하게 하이볼을 한잔 들이켜야지.

고독한 미식가처럼, 혼자 초밥에 하이볼까지 야무지게 먹고 조금 일찍 새로 갈 숙소에 도착했다. 집은 잠시 로비에 맡겨두고 근처 슈퍼에 가려는데 익숙한 과일 오토바이가 보인다.

"언니언니!! 망고망고 맛있어" 남동생집 로비에서 매번 과일을 팔고 있던 언니(실제론 한참 동생 같았다) 였는데, 오후에는 아마 이 아파트로 넘어오나 보다. 사실 그 언니는 맨날 보는 게 한국아줌마이니 분명 나를 기억할 수가 없을 터이데 꼭 아는 사람처럼 말을 거니 대꾸를 안 할 수가 없다.

"얼마예요?"  물으면 능숙하게 '칠만 동~~ 우만동~~,마씼서요, 이거~달아~~ 언니' 대답해 주는 한국말이 귀여워서 결국 나도 그녀의 고객이 되고 만다. 처음 보는 고리형 저울개로 무게를 재고, 봉투에 담아준다. 이제 길거리 오토바이에서도 과일도 잘 사는 나. 벌써 이 동네 사람 같다는 생각에 흐뭇해진다.
아들이 좋아하는 과일 샀으니 슈퍼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맥주를 종류별로 샀다. 이사라는 게 별것인가,

짐 풀고, 냉장고에 맥주 채워두고, 아들 좋아하는 망고 채워두면 그게 이사지.

양손에 봉지 하나씩 들고나니 막상 물을 살 손이 없어, 2L 페트 하나만 샀다. 내일아침 물이 떨어지면 그 핑계를 삼아 모닝커피를 사러 나와야지. 핑계를 만들고, 나는 그렇게 자꾸 조금이라도 이 생활을 즐기려는 잔머리만 늘어서 큰일이다.


새집에 가니 청소가 마쳐 저 있었다. 나름 멋을 부리신다고 조화를 꽃병에 꽂아두고 가셨길래 엊그제 샀던 꽃병으로 바꾸었다. 저녁에 마트 가서 생화 사 와서 꽂아두어야겠다. 내친김에 타오디엔에서 사 온 그림도 침대 머리맡에 두고 식탁 위에 집에서 가져온 스피커를 놓고 음악도 틀었다.  집안 곳곳에 나름의 내 취향을 진열해 본다.  비록 2주만 사는 남의 집이지만, 내가 '지금' 사는 집이기도 하니, 단 2주를 살더라도 내 집처럼, 내 취향으로 지내다 가야겠다. 머무는 집이 아니라, 살러온 집이니까.

망고가 약간 덜 익었길래 후숙 겸 식탁 위에 올려두었더니, 제법 동남아에 사는 집 같다.

원래부터 익숙한듯한 소파에 벌러덩 누워 인스타그램을 훑어보고 있으니, 엄마아빠가 한국에서 비행기를 탔다는 카톡이 온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아이들도 하교할 시간이다. 오늘 하교까지는 동생네 집에서 하기로 했기 때문에, 다시 동생네 집으로 하교시키러 간다.


이제는 집으로 간다가 아니라, 내 집에서 동생집으로 간다고 표현해야 맞다는 것.

이곳에 잠시지만 살 내 집이 생겼다는 것. 거기에 부모님을 초대한다는 것. 게스트에서 호스트로 바뀐다는 것.



이제는 다른 얼굴의 여행자가 되어, 한 달의 절반을 또 다른 버전으로 지내게 될 거라는 묘한 흥분감 같은 게 일렁인다. 때마침 동생네 집으로 돌아가는 그랩 안에서 본 강가의 윤슬이 반짝반짝 빛났다.


반짝반짝, 더 반짝이기를. 윤슬도,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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