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의 민족은 우리가 아니었어
처음 이곳에 와서 며칠간은 한국마트에서 재료들을 사다 나르며, 아이들의 저녁식사를 직접 해주었다. 아침에는 주로 시리얼, 낮에는 학교에서 웨스턴식으로 먹는 아이들에게 저녁만큼은 한식을 먹어야 할 것 같아서.
그래도 아무래도 남의 주방에서 맘껏 요리하기가 좀 조심스러워서 조리가 쉬운 메뉴들만 하다 보니 살짝 한계가 왔는데, 동생이 해 먹지 말고 시켜 먹으란다. 더 싸다고.
에이? 설마.. 했는데 처음으로 배달 K라는 앱을 켜고 검색을 해보니, 정말 다 싸다. 심지어 없는 게 없다. 뭣하러 내가 돼지고기와 고추장을 사 와서 버물버물 제육볶음을 했는가, 하는 현타의 순간이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배달을 시켜보았다. 제육볶음과 계란말이, 진미채. 두세 끼는 넉넉히 먹을양을 시켰는데도 15000원 정도밖에 하질 않는다. 배달료도 심지어 무료이다. 그랩오토바이를 불러서 배달을 시키는데, 원체 그랩오토바이가 싸다 보니 일정금액이상이면 배달료를 제외해 주는 것.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뜨끈한 김이 나는 제육볶음이 한국식 검은 봉지에 묶여 그랩오토바이를 타고 배달되었다. 베트남아저씨가 배달해 주는 제육볶음이라니. 이 기묘한 믹스 앤 매치. 재밌다.
사실매일 청소메이드가 와주셔서 청소며 빨래며 다 해주시니 내가 하는 가사노동이라곤 저녁상 차리는 게 전부였는데, 이마저도 외주가 싸고 효율적이니 내가 굳이 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심지어 아이들이 엄마가 해주는 것보다 맛있다고...(이런다고?)
그래서 그 후로 대부분은 배달을 시켜 먹었다. 추운 수영을 하고 온 날에는 순댓국을 시켜 먹기도 했고, 매운 게 당기는 날엔 마라탕을 시켰다. 야밤엔 고르고 골라 뿌링클 치킨을 시키기도 하고.
(혹시 동남아음식이 입에 안 맞아서 걱정이라는 분이 있으면, 호찌민으로 오세요. 한 달 내내 삼시세끼 한식으로만 드실 수 있는 그런 곳입니다.)
배달덕에 요리를 안 해서 내 몸이 편한 것도 있었지만 실은 요리하는 시간을 줄여서 아이들과 공유하는 시간이 늘릴 수 있는 게 좋았다. 저녁준비를 해야할 걱정이 없으니 해가 질 때까지 아이들과 수영장에서 좀 더 놀아줄 수 있었고, 한바탕 설거지하는 대신 간단히 치우면 되니 저녁에 마실을 나가서 놀이터를 가든 산책을 가든, 아이들과 놀 수가 있었다. 일할 때는 바쁘다는 핑계로 낮에도 놀이터 한번 같이 가주질 못했었는데, 이곳에 와서 밤에도 같이 놀이터에 나올 수 있다는 건 배달음식값으로는 상쇄되지 않는 가치였다. 매일 일하고 요리하고 밥 먹고 치우고 나면 한밤이 되어버렸던 서울의 삶대신 이곳에서 나는 저녁"시간"을 얻고 가치 있게 활용하는 게 참 좋았다.
그런 의미에서 물가가 싼 나라에 한 달 살기를 오는 것이 좋은 게, 낮은 비용으로만 해석될 수는 없을 것 같다.이곳의 쌀국수가 싸고 장보기 비용이 싼 것도 분명한 메리트이지만, 인건비가 싸다는 것, 그래서 내가 들여야 할 시간과 노동을 값싸게 대체할 수 있다는 게 오히려 더 메리트인 것 같다. 청소, 빨래, 요리, 운전과 같은 것들에 소요되는 노동력을 저렴히 사고 그 시간을 내 삶과 가족의 삶에 투자한다면 우리의 삶의 질이 얼마나 높아지겠는가. 특히 가사노동의 비율이 높은 삶을 살고 있는 엄마라면, 여기와서는 적어도 가사노동시간을 아껴 날 위해 쓰는 시간까지 얻어가는 셈인 게다. 한달이 아니라 한달+a 살기. 우리 같은 엄마들이 여행 좋아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가서 밥 안 하고 빨래 안 해서 그 시간에 놀 수 있어서 좋은 거지.
내가 만약 다시 재택근무로 일하는 업을 삼게 된다면, 난 방학마다 이곳에 와서 지내고 싶다. 가사노동을 줄이면 내 일을 오히려 더 생산성 있게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일과 육아, 살림의 3박자가 아니라 일과 육아 2진법 체제가 나의 퇴근 후 삶을 풍요롭게 할 테니. 일 년에 한두 달이라도 그런 상향된 질적 삶을 누리고, 경험해서 그것이 내 라이프스타일이 되게끔 만들고 싶다. 이게 바로 워케이션 (work+vacation) 아니겠는가.
그래서인지 실제로 여기에서 사는 엄마들은 한 끗 여유 있어 보인다. 아침이 일찍 시작되니 동네카페에 7시에 모여 앉아 모닝커피를 마시고, 골프든 테니스든 뭐든 하나씩은 배우러 다니며 취미생활을 하고, 하교한 아이들과 산책, 수영 등을 하며 느지막이 저녁을 맞이하는 모습. 물론 내가 본건 표면적인걸 수 도 있겠지마는 확실히 한국보다 전체적인 삶의 템포가 한결 여유 있고,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느낌이다.
배달앱을 처음 시키고, 이렇게 편히 살아도 되는 건가 잠시 불안했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이제 한국 가면 이 모든 혜택이 사라진다는 생각에 아쉽기만 하다. 한국을 돌아가도 방학이 1 달반이나 더 남았는데, 집에서 혼자 삼시 세 끼를 다시 찍게 될 시간들에 벌써 아찔하다.
사람이 참 불편한 건 해도 해도 불편한데, 편한 게 익숙해지는 건 한순간이다.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 편한 시스템에 익숙해지는 건 하루 이틀도 안 걸리니 말이다. 나는 오늘도 카페에 앉아 오늘저녁반찬거리로 이유네 반찬에서 떡갈비를 주문했다.
여기 와서 지내는 시간들이 너무 좋은 것에 반해 치명적인 단점이라면, 돌아갈 일상이 왜인지 힘든 삶이었던 거처럼 느껴진다는 것. 자꾸자꾸 여기의 삶이 익숙해지고 편해진다는 거다.
아, 이럴 거면 그냥 한 달이 아니라 일 년 살기를 올걸 그랬나 보다-
멜론도 무료체험3개월은 주던데..이 베짱이 체험은 몇달 더 못 늘리나요??
<참고링크>
배달 K 앱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teamjin.deliveryk&hl=ko&gl=US&pli=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