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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g Mar 02. 2023

[호찌민 한 달 살기]잘놀기

타오디엔 나들이

호찌민 한 달 살기 중 큰 미션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부모님을 초대하는 일이었다.

남동생이 호찌민에 온 게 2년이 다되어가는데 그간은 코로나 때문에 한 번도 초대를 못했기도 했었고, 워낙 평일주말 구분 없이 바쁘다 보니 부모님이 오셔도 동생이 케어해 줄 수가 없을 듯하여 , 미룬 일이자 숙제였다.

그렇다고 남동생 출근하고 올케 혼자 엄마아빠를 모시기에는 너무 부담되기도 했을 터이고.

그래서 자진해서 동생에게 제안했다. 나있는 동안 엄마아빠도 초대하자고.

일단 내가 집을 구할 터이니 엄마아빠는 거기서 지내면 호텔 안구해도되고, 아이들 학교 간 동안 올케랑 같이 엄마아빠랑 관광하면 서로가 덜 부담되니 내가 있는동안 초대하기가 여러모로 좋은 타이밍이었다. 뭐  물론 내가 조금 수고로움이 있겠지만, 미룬 숙제를 도와는게 이곳에 초대해준 동생에 대한 보은이 될 것 같았고 무엇보다도 일 년에 기껏해야 한두 번 친정에 가는 나도, 이참에 밀린 효도연말정산을 할 기회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의 한 달 살기에 엄마아빠의 일주일살기가 부록으로 예약되었다.


내가 있는 총 4주 중 3주만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는데, 그중 1주일은 엄마아빠가 오기로 되어있으니 결국 내게 주어진 자유시간은 딱 2주였다. 이미 일주일이 훌쩍 가버리고 나서야, 엄마아빠 입국이 며칠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놀아야 해! 잘 놀아야 해!! 만끽해야 해!!


그래서, 오늘은 서둘러 타오디엔으로 향했다. 타오디엔은 호찌민에서 청담, 강남쯤 되는 동네로 핫하고 이쁘고 멋진 게 다 모여있다고 온 책과 블로그가 입모아 얘기하는 곳이었다. 사실 '힙'한 거에는 별 관심은 없었지만 안 가보기엔 뭔가 아쉬울 테니, 오늘은 맘껏 그곳을 걷기로 하고 원피스에 운동화를 신고 아이들을 학교 보내자마자 달려갔다.


그랩을 타고 인스타그램에서 본 한국주인이 하는 옷가게 앞에서 내렸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무계획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랩에서 내릴 목적지하나면 내 계획은 충분했다. 수영복위에 입을 로브가 하나 꼭 사고 싶었는데, 그 옷가게에 직접 만든 (심지어 안 비싼) 로브들이 많아서 일단 오늘의 지갑은 그곳에서 처음 열기로 했다. 한국주인이라는데 주인이 없어서, 영어를 엄청 잘하는 직원분만 있었다. 약간 한국어로 스몰토크가 하고 싶었던 건지, 살짝 아쉬웠지만, 옷들이 너무 이뻐서 침이 꼴깍 넘어갔다.

https://instagram.com/project_hochiminh?igshid=YmMyMTA2M2Y=

한국에서 로브를 사 오려고 몇 개 서칭 하다가 이쁜 게 없어서 참고 오길 너무 잘했다. 소재도, 디자인도 어쩜 그렇게 이쁜지 베트남느낌이 가득한 범동남아적인 분위기의 옷들이 가득했다. 괜히 직원언니에게 이거 저거 추천도 부탁해 보고 입어보고 하다 보니 어느새 치마며, 로브며, 딸내미 티셔츠까지 카운터에 계산할 옷이 쌓여갔다. 그래도 한국로드샵에서 샀으면 아마 2-3배는 더 줘야 할 옷들이라며 나를 꼬시면서 이왕 연 지갑 활짝 열자 하고 내친김에 망사 양말까지 하나 얹어 첫 쇼핑을 마무리했다. 백화점은 재미없는데 이런 뒷골목 로드샵은 왜 이리 항상 재미있는지. 첫번째 쇼핑부터 성공이다. 오늘 왜인지 재미 있을거 같아진다.


일단 나와서 걷기시작했다. 동생이 타오디엔이 다 좋은데 , 길이 험하다고 (노후된 길이 많다고) 했던 말 때문인지 길만 보였다. 정말이지 그랬다. 지면 위는 가로수길 분위기인데 지면만큼은 70년대 뒷골목 수준이었다. 한국에서 12월만 되면 온갖 보도블록을 뒤집어엎으며 업그레이드하는 걸 보면서 또 세금떨이하나 보네- 비아냥 거리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매일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디디는 지면, 인도야 말로 어쩌면 가장 보편적인 복지의 지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과 유행이 빠른 것에 비해 한참 떨어진 도로사정의 호찌민을 보면 말이다.


땅이 제아무리 굴곡져도 여전히 내 두발은 건강하니까, 이제는 눈감고도 지나 칠 것 같은 오토바이들을 쉭쉭 피해가며 목적지도 없이 또 걸었다. 뭐하지, 뇌를 굴려보다가  갑자기 성시경의 "먹을 텐데 유튜브 호찌민 편"에 나온 월남쌈집이 타오디엔이었던 걸로 생각이 났다.그렇잖아도 여기와서 월남쌈을 못먹어서 아쉬웠는데 잘됬네, 하고 구글맵을 켠다.거봐라, 나는 계획이라는게 필요가 없다. 의식의 흐름이 계획보다 낫다.


걸어서 3분거리에 있던 월남쌈집.성시경을 만나도 그렇게 신기할 것 같지는 않은데, 성시경이 갔던 호찌민 식당에 내가 와있다는 건 조금 신기했다. 한국에서 보던 유트브의 장소에 내가 여기 있다니, 후훗. 촌스럽게 주인아주머니에게 유튜브를 보여주며 이거 보고 왔어요, 하고 제스처를 취했다. 나 같은 사람이 몇 있었는지, 아주머니 그래그래 안다알어. 그런 표정 ㅎ

드디어 월남쌈을 먹게 되었다.(현지어로는 남 르엉이라고 한다.) 1인분을 주문했는데, 뭔가가 다양하게 나온다. 내가 아는 월남쌈과 같은 듯 다른듯한 이 구성.  향신채가 많다는 것, 소시지가 들어간다는 것 외에도 우리처럼 라이스페이퍼를 물에 적시지 않는다는 게 다른듯하다. 내가 유튜브를 보면서 어리바리하며 쌈을 말고 있으니 주인아주머니가 와서 친절히 시범을 보이며 직접 싸주셨다. 나한테 묻지도 않고 향신채를 많이 넣으셨지만, 입맛만큼은 세계평화주의인 나는 또 이 동남아맛을 너무 사랑하지요. 내가 아는 월남쌈은 진짜 한국화 된 보급형이었다. 베트남사람들이 한국서 월남쌈을 먹으면 뭐라 할까 궁금해진다. 마치 내가 어디 태국 크루즈 뷔페에서 먹는 김치를 먹으면서 이게 김치냐, 하던 그런 기분일테지..

 향신채가 개운한 게 입안에서 퍼지면서 온갖 식감의 대표주자들이 입안에서 야무지게 다져지는 이 맛. 그래, 이게 먹고 싶었다.진짜 베트남맛, 진짜 월남의 쌈맛.


아침 11시에 모닝맥주를 마시면서 혼자 넴느엉을 먹는 유일한 손님이자 한국사람, 성시경보다 더 잘 먹을 텐데.. 의 표정으로 라이스페이퍼한장도 안남기고 다먹었다. 이렇게 두번째 스팟도 성공.


배 두드리며 걷는데 이쁜 문구점이 보였다. 문구류 구경하는 게 취미인 여전히 중학생 감성인 나는 일단 들어간다. 예쁜 그림들, 예쁜 엽서들, 조명들, 소품들. 사기엔 돈 아깝지만 보면 기분 좋아지는 것들이 가득이었다. 타오디엔이 재밌다고 하는 게 아마 이런 상점이 많아서 인듯싶다. 가게 하나하나에 즐길거리가 가득가득하다. 한국에서 사고 싶었던 아크릴 화병이 있길래  하나는 동생집에 주고, 하나는 낼모레 들어갈 집에서 써야겠다 생각하며 두 개를 덥석 샀다. 물가가 싼건 장점인가 단점인가? 그렇게 세번째 쇼핑도 성공.

혼자서 옷사고, 밥 먹고, 쇼핑하고 보니 시간이 훌쩍 금방 지난다. 올케가 '오키오'라는 카페를 추천하길래 "오키요" 라는 아재같은 대답을 한 후 고민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에어컨바람을 주문하고 , 커피를 얻어마셨다. 혼자 왔지만 맞은편 의자에 오늘 산 여러 쇼핑백을 친구 삼아 올려두고 잠시 둘러보며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 맛있어 보이는 빵오쇼콜라구경, 옆에서 일하는 외국인 구경을 해본다.

일을 그만두기 전까지는, 나에게 카페란 집대신 일하는 곳이었다. 언제나 묵직한 노트북을 드레스코드처럼 어깨에 이고 지고 가는 곳이었다.(지금도 스타벅스에서 글을 쓰고 있다..)

이렇게 노트북 없이, 하릴없이, 사고 싶었던 것들을 산 후 휴식으로 오는 카페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오늘하루, 참으로 충실하게 사고 먹고 쉬고 나를 위해 보내고 있음이 뿌듯하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놀아도 되나 불안과 죄책이 슬그머니 올라오는데,  몇 시간 후 다시 엄마로, 며칠 후 딸자식으로 노릇하며 지낼 시간들을 대비해 이 정도 충전하고 있음에 너무 맘무겁지 말자. 한번더 나를 달랜다. 네번째 카페까지 완벽.


돌아오는 길에 프랑스식 빵집에서 나 혼자만 먹게 될 바게트하나와 크루아상 몇 개를 집어오는 것을 마지막으로 타오디엔 나와의 나들이를 마무리했다. 계획이 없는 듯했지만, 이렇게 의식의 흐름대로 걷고, 마구 느끼고, 본능에 충실한 쇼핑을 하는 게 진짜 내 계획이었으므로, 나는 실은 아주 완벽한 나들이를 한셈이었다.


우리의 의식과 감정들은 사실 늘 여러 겹으로 덮여 있다. 어떤 사회적인 요구나 관계의 유지를 위해.  
마음과 정신에도 마스크를 쓰고 일상을 살아가는듯한 답답함같은게 늘 피곤처럼 달고살았었는데

이렇게 종종 나는 의식의 흐름대로 혼자 거닐게끔 나를 놔두어 그런 답답함을 해소하곤 한다. 내 안의 내가 잠시 마음의 마스크를 벗고 깊이 숨 쉬고 있게 해 주는, 내가 찾은 나만의 방식이다. 만끽하고 즐겁고 싶다는 것이 어떤 자극이나 새로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 의식을 자유롭게 해 주어서 맘껏 생각의 유영을 해주는 일이다.거참, 포장에 너무 애쓰는듯하지만.

혼자 모닝맥주에 월남쌈 하고, 실컷 놀다 온 것에 대한 우아한 변명을 하고싶었다.



아, 오늘도 혼자 티안나게 잘도 놀았다. 하지만, 더 놀아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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