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에 싸인하다
한국에서 미리 찜해두었던 집(남은 2주간 살)의 인스펙션을 다녀왔다.
에어비앤비 클릭 한 번이면 쉽게 예약이 가능한 곳이 이 아파트에만 수군데가 될 것인데, 굳이 구태어 인스펙션까지 가는 건 집을 확인하고 싶었던 맘도 있었지만, 어쩌면 나는 "외국에서 집 얻기"의 맛보기 버전을 체험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부동산 언니와 약속시간을 잡고, 시간에 맞춰 집에 가서 여러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물도 틀어보고 (아니 왜 ㅋㅋ) 먹고살 식기는 충분히 있는지 체크했다.
사실 이미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수영장뷰에 마음이 뺏기어서, 다른 것들은 중요치 않게 느껴지기도 했었고 이미 몇 주 사이에 에어비앤비나 아고다의 가격이 더 올라버렸기 때문에 사실상 오늘은 그냥 미리 구경 온 셈 이기도 했다. 부동산언니의 능숙한 '사모님' 호칭을 들어가며, 생각보다 쉽게 집 렌트는 성사되었다.
20만 원 정도 계약금을 그 자리에서 걸며 계약서를 쓰자고 하니, 따로 계약서는 없다고 하신다. 카톡이 있으니 괜찮지 않으냐고.. 물론 여러 가지 상황상 계약서가 없다고 이 집을 못 들어올 경우의 수는 희박했지만 그래도 언니.. 저는 그 어떤 리스크도 만들고 싶지 않아요. 이곳에서는 돌다리도 두들기는 게 아니라 돌다리도 만들어가며 지내야 제 속이 편해요..
다행히 사모님을 많이 모셔봤던 분이라 그런지, 흔쾌히 계약서를 준비해 주시기로 하셨고 다음날 우리는 다시 만나기로 했다.
다음 날, 부동산언니가 보내준 위치로 그랩을 타고 갔다가 깜짝 놀랐다. 둥지숯불구이, 화신각, 한솔회포차.. 뭐지 영등포 뒷골목 같은 이 느낌은.. 온 거리가 온통 한국음식점, 한국어, 한국사람.. 뭐야 여기 경기도 호찌민시인가.. 잠시 한국으로 여행온 착각이 드는듯했다.
그리고 그 골목 사이 어느 중심사무실에서, 부동산언니와 재회했다. 늘 한국회사원처럼 옷을 입는 부동산언니. 원래 집주인이 다른 부동산 사장이라 그 부동산 사장과 계약을 하는 상황인지라 부동산언니, 집주인, 나 이렇게 셋이 둘러앉아 계약서 2부에 각각 사인을 하고, 금액을 주고받으면서 각각 계약서를 챙겼다. 베트남어와 한국어가 뒤섞여있다는 거 외엔 이 모든 게 너무 한국 부동산에서 하던 거랑 똑같았다. 별거 아니네?
별거 아니지만 안 해봤으면 왠지 어렵고 못할 것 같은 일들을 해봤을 때의 그 성취감, 이거지 이 재미 지!
부동산 언니가 어디로 갈 거냐기에 근처 몰에 애들 크리스마스 장식 사러 가겠다고 하니 자기가 오토바이 태워준단다.. 하하 뭐야 나 언니랑 절친된 거야?
그렇게 힐 신고 치마 입은 언니가 모는 오너드라이버의 오토바이를 얻어 타게 되었다.
여기 온 지 4일 차 베트남 부동산 계약서 쓰고, 부동산 언니 오토바이 얻어 타고 시내 나가는 나의 이 적응력은 무식인가 용감인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동안 부동산언니가 수원 살았던 이야기, 제주도 이야기, 다음에 놀러 오면 만나자 약속까지 했다. 마음 같아선 같이 커피도 한잔하자고 데려가고 싶은데 그건 오버겠지.
희한하다. 여기 몰에 2번째 오는 건데 성복역 롯데몰만큼이다 친숙하다. 이제 베트남어들도 귓가에 어색하지 않고 가끔 들리는 한국어에 오히려 움찔움찔 쳐다보게 된다. 점심을 쌀국수를 먹을지 반미를 먹을지 고민하고 있고 이따가 커피는 코코넛커피를 마시면 딱 마시겠다, 이런 생각이 드네.
애들 학교에서 크리스마스 장식을 가져오래서 쇼핑을 하는데 3000원 차리 머리띠가 왜 이렇게 비싸게 느껴지는데..
뭐야.. 나 벌써 다 적응 끝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