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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g Feb 14. 2023

[호찌민 한 달 살기] 불안이 게을러지기를

혼자 온 여행

"생각으로는 생각을 잡을 수가 없어요. 근심해서 근심이 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의 대부분의 사고는 염려예요.  몸은 여기에 있고 정신이 어디에 가 있다는 헬러아어예요.

염려하지 마라,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요,네 몸이 있는 곳에 네 생각이 있어. 그런데 언제 그렇게 되냐? 좋을 때 그렇게 돼요. 이 사람하고 만났는데 좋을 때, 이 일을 했는데 좋을 때. 그때 인간은 몸이 있는 곳에 정신도 있어요. 숨을 쉬려면, 염려를 하지 않으려면, 몸이 있는 곳에 정신도 있어야 되는데, 그거는 생각으로 돌아오는 것보다는 우리 각자만의 방법이 있어요. 그거를 찾아내는 게 바로 여행의 백미예요. 여행은 그리스나 로마나 어디 스페인, 그게 여행이 아니라 내가 언제 그런 상태에 이르는지를 찾아내는 경험.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그 숨을 쉬는 곳을 찾아냈으면 좋겠어요"



-김창욱의 강연 중에서-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재택근무를 하는 회사에 다니던 나는 한 달 살기를 계획할 때만 해도 아이들이 등교할 낮시간에는 업무를 할 요량으로 한 달 살기를 계획했다. 한국시간으로 9-6시가 아이들이 학교 간 시간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한국에서보다 더 집중된 환경에서 업무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고, 근처에 업무 하기 좋은 곳들도 나름 서칭까지 한 상태였다. 하지만 10월 말, 회사의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급작스럽게 퇴사하였다. 그렇게 갑작스레 퇴사자가 되어버린 상태에서 온 호찌민은, 애초에 내가 이곳에 오려던 목적과 명분에 균열이 생겼다. 더불어 근심이 생겼다. 아, 이제 뭐 하고 먹고살지.


그러나 이곳 타국땅에 와서 걱정을 품고 있는다고 해서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심오한 고민과 처절한 자기 문답은 필요하겠지만, 걱정거리로써 불안만 안고 한 달을 이곳에서 보내기에는 내 앞에 펼쳐져있는 감각의 먹잇감들이 너무 많다. 애초에 태어나길 남들보다 더 많은 감각의 촉수를 가지고 태어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맞닿는 모든 것들이 영감인 이 페스티벌 같은 상경한 도시에서 나는 잠시 불안을 망각하고 영감을 득하는 것으로 목표를 바꾸었다.


그러기 위해 아이들이 학교 간 시간을 충실히 내 것으로 가져오기로 했다. 동생집에는 매일 청소해 주는 메이드가 오는 덕에 나는 이곳에서 집안일조차 하나 할 게 없다. 육아와 가사에서 해방 됐거니와 백수인 내가 이런 황금 같은 기회에 여기까지 와서 소파에 누워 걱정만 하는 건 바보짓이었다. 차라리 노는 게 낫다.


그래서 아이들 등교준비를 하면서 나도 같이 외출준비를 한다. 어디가 되든 무엇이 되었든 해보고, 정 안되면 걷기라도 하며 최대한 생각의 늪에 빠질 폐쇄적인 공간을 벗어나 있는 것이 나의 전략이었다.


한 달 동안 해볼 것과 가볼 곳의 리스트를 대충 잡긴 했지만 어차피 모든 게 낯선 집 근처만 해도 내게는 큰 놀이동산이었다. 오늘내일은 일단 동네부터 섭렵해 볼까



집에서 도보 3분 거리에 호찌민에서 나름 핫한 스타벅스가 있지만, 여기 있는 동안 스타벅스는 안 가기로 마음먹었다. 익숙한 것이 아니라 낯선 것을 한 움큼 집어먹고 싶다 가고 싶었고, 저번에 가보니 거기엔 동네 한국아줌마들이 대부분인 것도 한몫했다. 스벅 아아를 마시며 한국말을 듣는 건 내 로망이 아니었으므로.

그럼 일단 카페를 뚫어야 하므로, 오고 가며 찜해둔 로컬 카페를 찾아가 보았다.


"하이~~~ 굿모닝" 이곳에서 들어본 영어 중 가장 좋은 발음의 카페사장은 내가 카페를 오려고 횡단보도를 건널 때부터 크게 중저음으로 인사를 해줬다. 눈치 빠르시네. 노트북가방을 보고 내가 그곳으로 갈 줄 알았던 건가.

덕분에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들어선 카페는 멀리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나이스했다. 에어컨 대신 선풍기인 것도, 처음 보는 애플콜드브루 메뉴도,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멀리서 달려와 물컵위치까지 조정해 주는 아르바이트생의 성격도 다 너무 완벽했다. 게다가 사장의 영어실력 때문인지 대부분의 손님이 영어를 쓰는 외국인들뿐이라서, 그저 앉아있기만 해도 외국에 온 기분이 한껏 드는 게 좋았다.


회사일은 할 일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하던 일들이 몇 가지 남아있어 카페에서 한두 시간은 일처리를 해냈다. 태어나 처음 맛보는 맛있는 애플콜드브류를 마시며 호찌민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게 종종 현실감이 없기도 했다. 매일매일 지루할 만큼 같은 일상에서 살다가, 이렇게  현실감이 없도록 낯선 기분을 느껴보는 건 참 짜릿한 일이었다.


기분 좋게 몇 가지 일들을 처리하고 나와서는 동네 마사지샵에 갔다. 사실 여기 오기 전부터  베트남에는 머리만 한 시간씩 감겨주는 곳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어서, 샴푸마사지가 그렇게 해보고 싶었더란다. 오늘 머리도 안 감고 모자 쓰고 나온 이유가 다 있었지 난.


한 시간 두피 스케일링 샴푸와 마사지가 겨우 7천 원. 그나마 이 집이 좀 비싼 편이긴 해도 한국에서는 미용실에서 두피 스케일링만 몇만 원인 거에 비하면 너무 꿀이다.

머리카락을 한길 한길 책장 넘기듯 넘겨, 두피를 구석구석 샴푸해주는 그 쾌적함에 닭살이 계속 돋을 정도였다. 살면서 나조차도 본적 없는 내 두피를 누가 이토록 정성스럽게 씻겨준 적 있었던가.

아 이러다 여기 매일매일 오고 싶어 지겠는데.. 도통 계속 신나는 일만 있어서 큰일이다 큰일.


그 어떤 마사지보다 정말 가장 시원했던 궁극의 샴푸마사지덕에 두피에 먼지하나 없는듯한 홀가분한 기분이니 자 이제, 또 점심을 맛있는 걸 먹으러 가볼까.


입맛에 있어 어느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는,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편인데 아무래도 아이들과 내 호기심을 충족하기엔 한계가 많다. 로컬식당은 허름하거나 위생이 조금 걱정되는 곳도 많기도 하거나와 입 짧은 애들은 먹어본 게 아니면 시도조차 안 하려 드니..

그래서  아이들이 없는 점심시간만큼은 최대한 현지화된 로컬음식으로만 먹어볼 예정이다. 쌀국수도 돼지, 닭, 소고기, 내장 종류별로. 모든 향신채와 향신료를 경험하고 가리라.


그래서 근처에 가장 현지화되었다는 시장을 찾아갔다. 처음 가면 충격받을지도 모른다는 동생의 경고 따윈 무시하고 그토록 타보고 싶던 그랩 오토바이를 불러 첫 그랩 오토바이를 타고 떤미시장에 도착. 오토바이 요금 900원이 찍혔는데, 내가 뭘 잘못 봤나 다시 봤네. 와 900원이라니- 이제 혼자서는 그냥 오토바이만 타야겠다!


천 원짜리 사탕수수주스 한잔을 입에 물고 시장 구경을 나섰다. 와.. 동생이 걱정한 이유가 있었네. 정말이지 내가 30년 전에 엄마 따라갔던 영산포의 재래시장의 수준이었다. 두꺼비가 묶여있고 메기가 막 여기저기서 튀어 오르는.. 애써 침착하려고 해도 약간은 우 씨 우 씨.. 하고 놀라는 포인트들이 튀어나온다. 딱히 뭘 사려고 간 건 아니었던 데다가 여기서는 영어가 한마디도 안 통하는 분위기라 지금만큼은 그냥 일단 분위기에 적응하는 관찰자로 시장을 둘러보았다. 내가 아까본 스타벅스와 이곳은 너무나도 딴 세상 같다.


배가 고파 시장의 식당골목으로 들어갔다. 오늘의 목표는 분짜였고 비교적 쉬운 메뉴라 주문실패할 거라고 생각 못했는데, 분짜가... 잘 못 나왔다.. 분짜는 본디 찍먹이거늘, 이건 부먹 분짜였다.

눈이 휘둥그레진 나를 보고 이런저런 몸짓발짓으로 설명을 해주는 아저씨가 고마워서, 깜언깜언 (고마워요) 주는 대로 먹었다. ㅎㅎ 이러나저러나 배속에서 섞이는 건 똑같잖아 하고 먹는데..

이게 또 너무 맛있네. 잘못시켰다는 이야기가 무색하게 원샷 때리고 왔다. 대체 나는 안 맛있는 게 뭘까..

사장님이 준 청구서금액은 2천 원... 내가 지금 재벌집막내아들이 과거로 간 것도 아니고, 이 현실감 없는 가격들에 헛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 오늘 여기 와서 오토바이 타고 주스 마시고 밥 먹는데 3900원 쓴 거네??ㅎㅎ


움직이는 동선마다 신난 말투로 동생내외 단톡방에 사진을 보내니, 온 지 며칠 만에 바로 적응해서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내가 신기한지 혹은 안심이 된 건지  동생이 "너무 신났어..." 말만 반복한다. 하하


맞다. 나는 신이 나있다. 이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흥인줄 모르겠다. 눈앞에 장면들을 놓치기 싫어서 핸드폰은 가방에서 꺼내지도 않아 절로 디지털톡스가 되는 이 경험 참 오랜만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느라, 영어한마디 안 통하는 식당에서 메뉴를 주문하느라, 정육점에 걸려있는 고깃덩어리들을 코앞에서 마주하고 놀래느라, 내가 회사를 퇴사하고 내일을 걱정하던 사람인줄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것들이 내게 중요했는지 더 많이 깨닫게 되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오히려 조금 생각이 선명해지는 것 같고 마음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다는 안도마저 얻었다.


내가 나와 대화하는 시간,

내가 나를 기억해 내는 시간,

내 정신과 몸이 그 어떤 버퍼링이 없이 일치하는 순간들을 이곳에서 오롯이 마주하고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한 달 살기지만, 7:30 - 3: 30 사이는 이곳에 혼자 온 여행자가 되어 지낸다.

한 달짜리 혼자만의 외국여행을 득했다 생각하며, 염려와 불안은 돌아가는 비행기에서부터 해도 충분하다 믿고 가차 없이 미루며, 이곳에서의 나는 굶주렸던 영감을 채우고, 둔했던 감각들을 살리며 그것이 분명 돌아간 내 삶에서 한동안은 큰 자양분이 될 거라 믿는다


매일매일 더 열심히 부딪히고 그래서 내 안에 불필요한 어떤 것들은 버리고 무너뜨리며 굶주렸던 것은 채우기를 반복하는 시간으로 지내다 가야겠다.


그걸 얻으려고 온 게 아니겠는가

몸이 있는 곳에 정신이 있는 그 상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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