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만나야 할 폭풍우들을..

by 코스모스

아이 친구가 집에 놀러 왔었다.

서로 같은 동에 살았고, 엄마랑 아는 사이가 돼서 아이끼리도 친구가 되었다. 몇 번 같이 놀았고, 주 3회 학교 방과후 수업을 같이 듣고 있다. 우리 아이가 그 집에 혼자 놀러 간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친구를 초대했다.


친구는 내가 보아 온 첫째의 친한 친구들과는 결이 조금 달랐다.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하고, 주장하고, 요구할 줄 아는 아이였다. 그렇다. 나의 첫째는 부끄러움이 많아 생각을 잘 이야기하지 못하고, 말이 나오기까지 버퍼링이 있으며, 그 마저도 쭈뼛쭈뼛 어설프게 끝말을 흐린다. 그나마 우리와 있을 때, 친한 친구와 있을 때는 편하게 본모습이 나오지만, 그게 아니면 완전 다른 사람이 된다.

1년 넘게 다닌 학원의 선생님들께도 아직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인사를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께도 본모습이 다 안 나온다. 그렇게 작게 말하면 다른 사람은 전혀 못 알아듣고, 인사 같은 경우는 예의 없는 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수백번을 말해도 개미 소리로 인사를 하는 아이.


집에서 내가 보는 모습은 늘 쾌활하고 장난꾸러기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게 잘못일까.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는 일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나아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집에 놀러 온 친구는 자신이 사장, 딸아인 손님 역할로 식당 놀이를 했다.

그 다음엔 자신이 공주, 딸은 시녀 역할이었다.

마지막 놀이는 자신이 보호받고 귀여움 받는 막내 동생, 딸 아인 언니였다.


평소 나나 친한 친구들과 역할 놀이 할 때 딸이 하고 싶은 역할은 사장, 공주, 막내이다. 나는 어느 정도 맞춰주지만 친구들과 할 땐 하고 싶은 역할이 겹치면 서로 타협해 가며 번갈아 가면서 하는 모습이었다.

놀러 온 이 친구에겐 딸이 자신도 그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해도 전혀 먹히지가 않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양보하지 않는 아이였다. 명확하게 말해야 친구가 듣고 생각해 볼 수 있으니까 자신 있는 말투로 정확하게 전달해 보라고까지 말했으나 아이는 또 자신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했고, 역할은 그대로였다.


사장이 된 친구는 자신이 하고 싶은 요리를 해서 손님에게 낸다. 공주는 시녀에게 마차를 타겠다며 의자를 타서 밀게 했다. 밥을 먹여달라고 했고, 책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마지막에 아이가 용기를 내서 역할을 바꿔하자고 얘기했을 땐, 너가 언니를 해줘야 손에 들고 있는 과자를 너에게 주겠다고 했다.

더 이상 안 되겠어서 개입을 했다. 그 친구의 엄마가 없는 상황에서 내가 강하게 이야기하면 안 될 것 같아 돌려서 좋게 말하고는 역할 놀이가 잠시 중단되었다.

친구가 가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싶었다.


친구를 집에 데려다주려고 신발장 앞으로 가니, 첫째가 친구의 양말을 신겨주고 있었다. 너무 속상했다. 긴 양말은 자기가 잘 못 신는다며 딸에게 해 달라고 한 거였다.


집에 와서 잘 준비를 하고 딸에게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역할을 정해 연습도 했다.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려는 친구는 좋은 친구가 아니라고 했다. 친구의 말을 거절하지 않고 다 들어주는 것은 답이 아니다. 그러고 나니 딸이,

"엄마, 근데 저 혼내지 마세요. 친구가 얼마 전부터 방과후 수업 끝나고 저한테 가방을 들어달라고 해서 들어줬어요."

"친구가 왜 가방을 들어달라고 했어?"

"다리가 아프다고 했어요. 아마 겨울방학 시작할 때쯤부터 그랬던 거 같아요."

"방과후 수업마다 그랬다고?"

"매번은 아닌 거 같은데 거의 매번인 거 같긴 해요."

"정말 다리를 다쳤던거야?"

"잘 모르겠어요. 다리가 아프다며 가방을 저한테 들어달라고 하고, 5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내려가길래, 진짜 아픈 거 같았어요. 처음에는요. 그런데 매번 아팠는지는 모르겠어요. 한 번은 가짜인 거처럼 보이긴 했는데 넘어졌어요. 어제는 급식실에서 다리를 삐었다고 했고요."

"그럼 너는 그 가방을 들고 어떻게 했어?"

"저는 계단으로 2층으로 가서 가방을 줬어요."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꼭 참았다. 방학의 시작은 3주 전이었다.

'계속 들어주면 그런 친구는 계속 너에게 부탁을 할 것이고, 그게 계속되면 너를 이용하는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친구에게도 너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니 네 생각을 명확하게 전하고 거절의 말을 잘하면 좋겠다. 네가 몇 번 거절하면 더 이상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자기 일은 자기가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한다. 가방을 못 들 정도면 학교에 오지 못했을 거다. 아까도 초등학교 1학년이 양말이 길다고 못 신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친구는 누가 누구의 부탁을 들어주기만 하는 사이가 아니다.'

여러가지 예를 들어가며, 내 경우도 이야기해가며 한참을 말했다.


"엄마 근데 좀 무서워요."

"세상엔 좋은 사람들이 훨씬 많지만, 나쁜 마음을 먹고 착한 사람을 이용하려는 사람도 가끔 있어. 그 친구도 잘못된 행동을 알아야 하고, 상황이 더 심각해지지 않게 내일은 꼭 거절을 하면 좋겠어."

"엄마, 근데 혹시 내일 또 거절 못하면 저 혼내실 거예요?"


거절의 말을 할 자신이 없는 아이는 그 뒤에 친구가 삐질 상황을 걱정했다. 네가 잘못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그건 그 친구가 해결할 감정이라고 했다. 용기를 내 보자고, 정말 노력했는데도 안되면 어쩔 수 없지만 하루아침에 거절을 잘하는 사람으로 변신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 혼낼 일은 아니라고 했다.


이제 겨우 만 8년을 살아온 아이가 세상의 잔혹함, 인간의 악랄함 같은 것을 알리 만무하지 않은가. 내 입으로 아이에게 그런 세상의 단면을 이야기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단단한 아이가 되려면, 정글 같은 곳에서 살아 남으려면 아이도 알아야 한다.


내 말을 얼마나 이해했을지 모르겠다. 세상을 무지개로 보던 순진한 아이가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할지 모르겠다. 딸 친구의 엄마에게 이 일을 이야기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말한다면 어디까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온통 답을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나도 결국 상대방의 부정적인 반응을 지레짐작하며 고민하고 있다. 내 앞가림도 못하면서 아이에게 무슨 말을 늘어놓았던가..


나를 너무나 닮은 아이이기 때문에 아이의 마음이, 무엇이 두려운지 누구보다 잘 이해되었다. 하지만 나보다 시행착오를 덜 겪으면 좋겠다. 조금만 괴롭고, 조금만 상처받으면 좋겠다. 아이가 겪는 세상이 반짝반짝하진 않을지라도 무채색은 아니면 좋겠다.


자연스레 내 생각의 꼬리는 둘째가 받은 학대 사건까지 갔다.

자식을 키우는 일은 도대체 얼마나 고통스러워야 하는 건지, 결국 부모는 그 고통을 견뎌내야만 하는 사람인건지 도통 모르겠다. 아이들이 만날 폭풍우를 내가 대신 겪고 싶다.

한동안 의식하지 못하고 평화롭던 호흡이 조금씩 가빠져 오려고 한다. 생각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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