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힘

by 보라구름

어제는 늘 먹던 푸로작을 두 알에서 한 알로 줄이고, 커피를 전혀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약간의 알코올을 섭취했더니 트립토판을 먹지 않고도 침대에 누워 금방 잠이 들었다. 중간에 잠에서 깨어 설치지도 않고 제법 잘 잤다. 얼마만의 숙면인지 모를 정도로 오랜만에 제대로 잠을 잤다. 덕분에 아침부터 우울한 기운 같은 건 없었고 제법 활기차게 창문을 열었다.


사실 어제저녁 약속이 있다는 걸 알고 난 후로 침대에 누워 막연하게 나가기 싫다. 누워 있고 싶다. 잠들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다가 점점 그냥 이렇게 누워있다가 소멸되고 싶다는 생각까지 가버렸다. 계속 작아지고 작아져서 점처럼 작아졌다가 후 불면 날아가는 먼지처럼 그 먼지 중에도 아주 작은 먼지처럼 변해서 눈에 띄지도 않는 티끌이 되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려던 작업은 지지부진, 몇 문장 만지다 덮어버렸고 계속해서 잠을 설쳐서 몸이 너무 피곤해서 컨디션이 엉망이었던 탓에 침대에 누웠던 건데 끝은 소멸되고픈 욕망을 발견하는 것이라니. 누워서 가라앉은 기분과 몸으로 침대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앞에 괴물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나를 집어삼키려고 하는데 너무 놀라 피하려고 뒷걸음질 치니 내 뒤로는 까마득한 절벽인 상황. 우울증과 무기력증 앞에 놓인 내가 딱 그러하다. 그래서 그걸 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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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너무 못 그려서 트라우마가 있을 지경이지만 그래도 내 감정을 표현하는 데 글 말고 그림도 동원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그림을 그려봤으나 역시 손발이 오그라든다. 게다가 하필 내게는 왜 초등생 그림일기장이 있는 것인가; 아무튼...


결국 우울과 무기력 앞에 맥없이 늘어지던 나는 저녁 약속 장소에 용케 나갔고 태국 음식점에서 실컷 맛난 것을 먹고 바에 가서 칵테일도 마시고 노곤해진 몸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출근이라는 일상이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에 한없이 안도하고 있다. 직장 생활이 나를 힘들게 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음에도 프리랜서 대신 굳이 직장에 적을 두는 것을 조금이라도 길게 하려는 것은 일상에 기대고 일상의 힘에 의지하려는 마음이 크다는 걸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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