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길 <풀업>
강화길 작가의 소설 <풀업>을 손에 들자마자 그 자리에서 다 읽어냈다. 심지어 그렇게 읽을 거란 예상을 한 게 아니라 매우 구부정한 자세를 유지한 채로, 손에서 놓지 못하고 한숨에 읽었다. 분량이 짧기도 하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48번째 책이다.
내 경우는 주인공인 지수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더 공감이 갔다. 주인공의 여동생.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서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하고 그 감정선을 따라가는 편인데 이 소설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별로였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한 호흡에 다 읽었을 만큼 흡입력 있는 구성과 전개(심지어 큰 사건도 없다)에 빨려 들어갔다.
가족 내 여성 서사를 다루는 소설이다. 세 모녀의 이야기. 엄마 영애 씨와 딸 지수와 미수의 이야기다. 아무래도 여성 독자들의 마음에 좀 더 와닿을 수 있는 부분이 있겠지만 많은 독자들이 자신의 가족을 소설 속 가족에 대입해 보며 많은 공감을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후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지만, 반전이 있거나 중요한 사건이 전개되는 스타일의 이야기는 아니니 읽고 나서 책을 보셔도 괜찮을 듯합니다.
*줄거리
지수와 미수는 두 살 터울 자매로 타고난 기질이 다르다. 외향적이고, 도전적이고, 뭔가를 잘 해내는 타입의 동생인 미수와 그 반대쪽에 좀 더 가까운 언니 지수. 대학은 재수로 입학, 취업도 늦었고 나중에는 전세 사기를 당해 엄마와 여동생에게 돈을 받아 메꾸고, 엄마의 집에 들어와 살게 된다. 지수의 엄마는 아빠의 사망보험금과 약간의 저축, 막내딸의 지원으로 집을 샀다. 엄마가 구체적으로 생활비를 어떻게 조달하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지수가 내는 생활비, 미수가 매달 보내는 용돈, 아마도 연금으로 생활하는 것 같다. 미수는 언니인 지수가 취준생인 시절에 용돈까지 줬을 만큼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지수는 자신의 힘으로 이제야 인생을 살아가려고 힘을 모은다. 경제적, 정신적 독립을 원함과 동시에 물리적으로도 체력을 기르는데 최선을 다하며 1:1 PT를 받고 엄마의 저녁을 준비하는 대신 혼자서 영화를 보기도 한다. 독립하기 위해 집을 구하겠다는 지수는 언니로서의 자존심인지, 5년 전에 빌린 돈 500만 원을 동생 미수에게 내민다. 이자는 한 푼도 주지 않았고, 힘들 때 도와줘서 고마웠다는 말을 하는 대신 서로에게 온갖 상처가 될 말을 폭탄 다발로 만들어 서로에게 집어던지고 난 뒤에 내밀었다. 이걸 갚을 테니 이제 너랑 나는 끝이라는 의미를 담아. 부모 자식 관계니까 안 갚아도 된다고 생각한 건지 엄마에게는 끝내 지원받은 돈 300만 원을 갚지 않고 이사를 나왔다.
세 모녀는 각자 복잡한 입장으로 얽혀 있지만 최대한 화목한 가정을 유지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한다. 하지만, 의식과 무의식 사이 어딘가에서 애증이 뒤엉킨다. 자격지심과 질투, 무시, 분노가 세 모녀 사이 견고하지 않게 쳐진 거미줄 같은 연결고리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소설은 한 인물의 입장에서만 전개되지 않는다. 자, 이제는 **의 입장이 궁금할 것이다..라고 하며 각 인물들의 서사를 풀어간다. 그래서 산만한가 하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오, 그래 어디 이 사람 입장은 뭐래? 하고 눈을 반짝이며 읽게 만든다. 그럼에도 유독 내가 소설 중에 얄밉게 그려지는 미수에게 공감이 간 건 오로지 내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해야 했고, 끊임없이 부모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했다. 착한 딸이나 효녀 소리 들어보고 싶어서 용돈을 좀 과하게 몇 번 드리는 그런 게 아니고 정말 생계형 지원. 한 때는 온 가족이 출근하기 전에 차례로 내 방문을 두드리며 들어와 돈을 타 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참 어이가 없다. 그들 모두 지나치게 당당했다.
집안의 가장 어린 막내에게 경제적으로 기대는 가족. 나를 뺀 나머지 세 가족이 제발 자기 앞가림을 좀 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20대 초반부터 하며 살아왔다. 자기 앞가림: 다른 사람에게 금전적으로 기대지 않고 스스로 살아가는 성인
이 글의 제목은 소설 속에서 미수가 지수에게 했던 말의 변형이다. 원래는 이랬다.
사실, 나는 언니가 항상 뭘 모른다고 생각했어
나는 미수가 되어 다시 지수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