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냐 넌
휴직을 하면서 인생 처음으로 긴 휴식시간을 갖게 되어 알게 된 새로운 것들이 있다.
1. 쉬는 법을 모르고 살아서 쉴 줄을 모른다.
2. 휴직 중인데 늘 피곤한 것을 보니 스스로 가만두질 않나 보다.
3.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할수록 모르겠다.
나 자신을 알아보고 자아를 찾기 위해서 휴직을 한 건 아니다. 하지만 이왕 시간이 주어진 김에 스스로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며 고찰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 자아를 찾는다는데 40대의 나이가 뭐 대수인가.
갑자기 스스로에 대해 알아보려고 하니 생각보다 막막했다. 자신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질문에 답을 하는 형식이 적합해 보였다. 녹음 어플을 켜 놓고 셀프 문답 인터뷰를 할까도 싶었지만 스스로 질문을 하고 답변을 하려니 객관화가 안될 것 같았다.
수영도 책으로 배운다는 말이 있다. 책으로 모든 걸 배우려고 하는 사람을 빗댄 농담인데 사실 내가 그런 사람이다. 뭐든 책으로 배워보려고 한다. 나를 알아가기 위한 방법도 책에서 찾았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고, 서점에 가서 찾아보니 스스로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질문 형식의 책이 꽤 있었다. 내용을 살펴보고 괜찮아 보이는 질문 책들을 다섯 권 사가지고 왔다. 책 안에 질문에 대한 답을 적을 수 있는 형식으로 제작된 책이었다.
어, 나는 분서 같은 걸 할 타입은 못되는데 이걸 어쩐다? 책을 태우라는 것은 그만큼 솔직하게 질문에 답하고 그것을 기록하라는 메시지인 것임을 알지만 나는 자꾸만 불태워지는 책을 상상하고 있었다. 순간, 아니 그렇게 솔직하게 답했는데 이 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다 기억할 수도 없을 테고, 태워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곤란하다 곤란해. 결국 나는 질문책을 태워버리거나 없애버리거나(다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솔직하게 쓰는 것에도 스스로 합의가 되지 못한 상태로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니 100% 솔직하게 답을 적게 될 리가 없었다.
집중해서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버거웠다. 100% 솔직하지 않은데도 말이다. 내가 이걸 너무 쉽게 생각했나? 아직 초고난이도의 질문과 마주한 적도 없고 쉬워 보이는 질문에 답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질문에 답하느라 집중한 지 한 시간도 안되어서 이미 자각하기 시작했다.
아, 나는 스스로를 잘 모르고 있구나.
한참 남은 페이지를 넘겨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직도 내게는 시작하지도 못한 다른 책 4권이 더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그냥 다 그만둘까도 싶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힘들게 하나. 그러자 초자아의 외침이 들려온다.
평생 스스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살 거야?
그럴 수는 없지, 없는데... 너무 힘들다. 애당초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를 잘 안다고는 하지만 조금 모르는 부분도 있겠지, 그런 부분을 알아나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반대가 되어버렸다. 조금 아는 부분도 있는데 상당 부분 잘 모르거나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솔직히 그래서 무섭기도 하다. 어디서 괴물 같은 구석이 나올 수도 있고, 원치 않는 모습을 발견해서 좌절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러다가 그냥 슬그머니 없던 일로 하고 질문책은 안 보이는데 깊이 넣어두게 될 것 같았다.
고민 끝에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브런치 연재 북을 만들어버린 것. 연재라니! 틈 날 때 써서 올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올리겠다고 약속한 시점에 글이 올라와 있어야만 하는 연재! 이렇게 약속을 담보로 하지 않으면 나의 자아 찾기는 시작하자마자 끝날 지경이었다. 이제는 용기를 내어 자아 찾기의 여정을 제대로 시작하는 일만 남았다.
부디, 무사히 연재를 마치고 에필로그를 올리는 날이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