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신가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처음 인사를 나누게 되는 자리에서 의례 하게 되는 자기소개. 인사하는 곳의 성격에 따라 보통은 이름(닉네임), 나이(연령대), 직업(직군), 사는 곳(도시) 정도로 하게 된다. 모임 내 소개일 경우 참여 동기나 취지를 설명하고 그 외에는 인사를 나누는 대상에 따라 부가 정보를 더하기도 하는 그런 수순이다.
이런 자기소개가 통하지 않을 때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명상모임이나 템플 스테이 프로그램 같은 곳에서 자기소개를 할 때다. 이름이나 직업, 나이, 가족 이야기 같은 건 자신이 불리는 것, 먹고사는 수단, 거주하는 공간, 함께하는 사람을 알려주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알려주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엥? 그럼 뭐 어떻게 자기소개를 하라는 건데?
스스로를 알아가기 위해 구입한 몇 권의 책과, 서치 해본 질문들을 뒤져봐도 자기소개를 이렇게 해보라고 하는 딱 들어맞는 가이드 같은 것은 없었다. 혹은 있었더라도 수긍이 가지 않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애초에 나를 소개하는 방식은 내가 정하면 될 것이라 가이드를 찾을 필요가 없었던 게 아닐까.
부침이 많은 삶을 살아내는 중이고, 잠시 쉬어가고 있습니다. 요즘 저는 저를 가만히 안아주고 싶습니다.
내가 선택한 자기소개는 이렇다. 아직 여기 브런치 이외에는 어디서도 이렇게 나를 소개한 적은 없지만. 이름, 나이, 직업을 제외한 자기소개 자리가 생긴다면 저렇게 이야기하게 될 것 같다. 소개가 끝난 후 담소를 나누는 시간이 온다면, 사실 '가만히 안아주고 싶기만 한 건 아니고 가끔은 쥐어 패고 싶기도 하고, 울든지 말든지 내버려 두고 싶기도 하다고도 말하고 싶긴 하네요. 가만히 안아주는 건 자기 자신이라고 해도 쉽지만은 않더라고요.' 하고 덧붙일 거 같다.
스스로를 찾아보겠다고 질문에 답하는 책을 들고 여행을 가고, 거기서 열심히 답변을 적어보기도 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인 현재를 다루는 부분과 스스로에 대해 솔직해져야 하는 부분, 가족 이야기를 다루는 챕터에서는 도무지 진척이 되지 않아서 백지 페이지로 남겨둔 채 한참이 지나도록 그냥 덮어두고 있다. 미래 챕터는 아직 근처도 가지 못했다.
답답하게 진도가 나가지 못하는 질문책을 잠시 밀어 두고 꺼내든 책은 명상 관련 책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 저자: 루퍼트 스파이라/출판사: 퍼블리온이다. 그동안 몇 권의 명상 책을 봤지만 너무 어렵거나, 같은 말만 변주해서 반복하는 경우가 많아 고개를 저으며 책을 덮은 경험이 있어서 이번 책에도 크게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명상에 대해서 이렇게 친절하고 쉽게(상대적으로 쉽다는 것이고 아주 쉽지는 않음) 설명한 책은 처음이었다.
책에서 알아차림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기 쉽게 비유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에 대한 비유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스크린이 있고 그 스크린을 통해 영화를 본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내내 그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영화 속 내용이 어떤 내용이더라도 그 내용이 스크린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색채가 남거나 상흔이 남는 등)
'영화 속의 풍경을 볼지 아니면 스크린을 볼 지 여부는,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처음에 우리는 영화 속의 풍경을 보게 되고, 그러고 나서야 스크린의 존재를 인지하게 되고, 그다음에 스크린을 풍경이라고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
스크린에 비유한 대로 내 생각과 감정은 나에게 일어난 하나의 이벤트(사건)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내가 경험한 것들은 있었지만 사라지는 것이고, 스크린처럼 항상 존재하는 늘 그대로의 것이 알아차림이다. 그 문장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내가 선택한 자기소개의 문장에 부침이 많은 삶이라는 표현 속에 담은 사건과 그것으로 파생된 생각과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질문 책에서 도망쳐서 만난 명상책에서 뜻밖의 위로를 얻고 용기를 냈다. 다음 편에는 질문 책으로 다시 돌아가 답변을 적어보고, 현재 챕터를 완성하는 게 목표다.
*세이브 원고 없이 연재하는 건 역시 무리;(다음엔 꼭 세이브 원고 쌓고 발행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