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자아를 무찌른 자아의 첫 승리

7박 8일 나 홀로 제주여행

by 보라구름

해외여행은 3주 이상 혼자 다닌 적이 여러 번 있다. 하지만 그중에는 현지에서 살고 있는 지인과 만나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다. 딱 한 번 작년 베를린 한 달 살기 및 북유럽 여행 때만 빼고. 그때를 제외하고는 장기 여행을 혼자 해본 적은 없었다. 베를린에서는 일을 하면서 휴가를 붙여서 간 거라 온전히 여행을 했다고 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국내 여행은 혼자서 다녀본 적이 있던가? 의외로 국내 여행은 혼자서 해본 적이 없었다. 제주도에 다녀온 지 좀 되었으니 한번 가보자는 마음으로 5박 6일 일정을 잡았다. 그러다가, 이 정도 일정은 회사 다니면서 휴가 써도 다녀올 수 있는 일정이라 휴직 중이니 좀 길게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7박 8일로 변경하고 일정을 다시 짰다. 숙소를 세 군데로 잡았고 하루에 한두 곳 정도 가보는 일정으로 휴식 그 자체인 여행을 처음으로 가게 되었다.


20231116_085447.jpg 오랜만에 찾은 제주, 안녕!


문제는 날씨였다. 제주 여행 첫날에는 비바람이 심상치 않더니 둘째 날에는 강풍경보 알림 재난문자가 왔다. 제주도 바람은 육지의 바람과는 확연히 달랐다. 우산은 셀 수 없이 뒤집어졌고 그렇게 험상궂은 얼굴을 했다가 미소 지었다가를 몇 차례 반복하며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널뛰는 날씨가 꼭 내 마음상태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났다. 제주 날씨야, 너도 내 마음 같구나.


오션뷰가 중요했던 내가 잡은 두 번째 숙소의 통유리는 굉음을 내는 바람 소리와 세차게 창문을 두들겨 패는 듯한 빗소리로 요란하게 인사를 건넸다. 가끔 뉴스에 제주 게스트하우스나 펜션의 유리가 강풍에 깨졌다는 걸 본 적도 있던지라 걱정이 되긴 했다. 제주의 강풍경보는 거의 태풍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일기예보에는 다음날 날이 개는 것으로 나와 있어서일까, 생각보다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끝나는 게 명확하다는 걸 알면 불안도 잦아든다는 걸 느꼈다.


20231119_073616.jpg 서서히 맑은 하늘을 보여주는 숙소 오션뷰, 비양도


정신을 못 차리는 이틀을 연달아 보내고 세 번째 날 드디어 날이 개고 푸른 하늘이 보였는데 문제는 햇빛이었다. 아, 제주도지. 11월에 뭐 햇빛이 얼마나 강하겠어라고 생각한 내 잘못이었다. 숙소에서 바라보는 통창 오션뷰는 너무 좋았으나 조금만 바라봐도 눈이 너무 부셔서 눈아지랑이가 눈을 감으나 뜨나 계속 피어서 고생을 했다. 선글라스는 챙겨 올까 하다가 그냥 책상 위에 두고 온 게 너무 후회되었다. 급히 해변 근처 편의점과 큰 마트에서 선글라스를 구해보려 했지만 선글라스는 어디에도 없었다.


혼자 식사가 가능한 식당을 찾는 것도 일이었다. 단품 메뉴가 있어도 세트 메뉴 주문 후 추가 시에만 가능하다고 하거나, 지금은 곤란하다고(그럼 언제? 일부러 혼잡한 시간대를 피해서 갔는데) 거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식당은 많고 많아서 발품을 좀 더 팔면 혼자서 식사를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일주일 넘게 혼밥, 혼카페, 홀로 탐방을 했지만 외롭다거나, 누군가와 대화하면서 시끌벅적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런 여행은 그런 여행 나름의 즐거움이 있는 만큼 혼자 하는 여행은 뭐든 내 맘대로 해도 그만이라는 자율성이 있으니 그 나름대로 좋았다. 계획형 인간이라 스스로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지만 돌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계획으로 변경해도 나 자신만 이해시키면 되는 일이라 편했던 것 같다.


20231119_133401.jpg 드디어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여준 바다, 건너편의 비양도는 보기만 해도 좋았다.



여행을 하면서 세운 당찬 목표는 나름 긴 여행이니까 생각할 시간도 많을 것 같고, 어딜 가보는 것도 날씨 때문에 취소된 것도 있었고, 가급적 휴식을 위한 여행을 하고 있어서 연재 글 세이브를 두 개 정도는 쓰려고 했다. 책도 보고, 나를 알아가기 위해 구입한 문답책도 열심히 작성해 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결론은, 연재 글 세이브는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막상 휴식 여행을 해보니(이렇게 편하게 내 맘대로 쉼 위주의 여행을 처음 해봤음) 너무 좋은 것이었다. 새로운 카페도 발견하고, 동네 골목골목 산책도 하고,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 아닌 한적한 곳으로 다니는 것이 좋았다. 숙소에서 바다멍을 실컷 할 수 있는 것도 좋았다. 눈이 아프긴 했지만 그마저도 괜찮았다. 스스로 항상 뭔가를 하라고 재촉하는 타입이라 이렇게 진짜 쉬엄쉬엄 별 것 안 하면서 8일을 보낸다는 경험 자체가 의미 있었다. 쉬려고 온 여행에서 뭔가를 하려는 목표를 세운 것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아서였나 제대로 쉬느라 책도 별로 읽지 못했고 일기 이외에 별다른 글은 아예 쓰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전처럼 나는 스스로를 몰아세우지 않았다. 평소라면 아래와 같은 초자아가 하는 말들로 스스로를 비난했을 텐데.


이럴 거면 왜 길게 혼자 여행 왔어. 여행 와서 글 쓰기로 해놓고 지금 뭐 하는 거야. 책은 무겁게 들고 와서는 고작 이 정도 읽으려고..... 등등


일주일 넘게 혼자 잘 쉬고 여행했으면 별다른 아쉬움이 남지 않을 것 같았지만 여행 마지막 날이 되자 다음에 또 언제 제주에 올까? 그때는 어디를 가볼까? 그런 생각들로 벌써 다음 여행으로 설레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김포공항에 도착해서 마중 나온 남자친구를 향해 캐리어를 밀며 달려갔다. 환하게 웃으며!


어, 근데 남자친구의 반응이 어째 어정쩡하고 평소와 달랐다. 당황하는 듯한 모습이랄까? 나중에 물어보니 내가 너무나도 환하게 웃으면서 달려 나와서 최근의 내 모습과 매치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최근의 내 모습은 어땠는데? 물으니 항상 뭐 씹은 표정이었지..라는 즉답이 날아왔다.


아, 그렇구나.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가 공항에 마중 나온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닌데 출장에서 돌아올 때는 피곤에 절어서 너덜너덜한 상태로 나왔고, 일과 휴가를 겸한 여행도 피곤하긴 마찬가지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해외에 다녀온 것도 아니라 시차도 없고, 제대로 혼자 마음껏 쉬다 온 여행이 처음이라 정말 밝고 환한 미소를 장착하고 트렁크를 밀고 달릴 에너지도 남겨둔 채 돌아온 거였다.


여행 중에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은 덕분에 정신건강이 제법 안정을 찾았던 게 꽤 중요한 변화가 아니었다 싶다. 처음 도전해 본 국내 장기 나 홀로 여행 및 진짜 쉬는 여행은 그렇게 무탈하게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쉬면서 진지하게 자아탐구를 한다는 건 애초에 계획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여행 중에 깨닫고 그냥 푹 쉬어버린 나 자신을 칭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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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자책하거나 죄책감 갖지 않고 일주일은 혼자 잘 쉴 수 있는 경험을 간직한 사람이 되었다. 오늘은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어떤 메뉴로 하루의 식사를 챙길지 생각하면서 지냈던 일주일은 새로운 발견이기도 했다. 쉬어도 되는구나. 스스로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기로 한 일을 못해도 되는구나. 거대 초자아를 무찌른 내 자아여 장하다!


(제주 사진은 모두 직접 촬영, 자료 사진은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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