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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이다 Jun 26. 2022

쓸모없는 것들

- 그림에세이(13)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에 낯선 이의 머리카락이 끼어있는 건 싫어.

그래도 누군가 책장을 넘기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을 장면이 떠오르면 그것도 괜찮아져. 

불 꺼진 방에 혼자 누워있을 때 

문득 방 안 깊숙이 비추고 가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좋아. 

밤이 물처럼 쏴아, 흘러가는 것처럼 보여서 좋아. 

낮에도 환하게 켜져 있는 가로등을 만나면 좋아.

지난밤에 만났던 행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아 좋아.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모임 자리에 가는 거 싫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도 좋을 자리에서 1인극의 배우처럼

혼자서 큰 목소리로 끊임없이 떠드는 사람 싫어.

그런 사람이 내게 목소리 좀 크게 하라고 하는 거 싫어.

넌 내 이야기 안 들어도 되거든? 

도전하라, 당장 시작하라, 인맥을 넓혀라, 일찍 일어나라, 라고 외치는

자기계발서가 정말 싫어. 

그런 책을 보면 망망대해에서 죽도록 노 젓는 노예가 된 기분이야. 

직장생활도, 결혼도 해보지 않고, 아이도 키워보지도 않은

성직자들이 하는 힐링 조언들 정말 싫어. 

그 현실도 모르는 공허한 목소리들이란...

대충 깎아놓은 이젤 앞 몽당 4B연필이 좋아. 

데생하다 손바닥이 시커멓게 된 거 좋아. 

그림을 다 완성하고 화장실 거울에 섰을 때 

얼굴에도 검정이 붙어있는 걸 발견했을 때 좋아.

얼굴을 검정을 묻히는 것도 모를 만큼 

내가 진짜 깊은 몰입을 했었다는 징표잖아.

내리막길에서 살짝 엉덩이를 들고 달리는 

자전거 탄 사람들이 섹시해 보여 좋아.

주말 오후, 누군가 흘려놓고 간 계단통로를 떠도는 향수 냄새가 좋아.

깔끔하게 차려입고 외출하는 사람의 설렘이 느껴져서 좋아.

허허허, 너털웃음 짓는 노인의 주름진 얼굴이 좋아.

그래그래, 누구나 다 그런 거야.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인생은 살아볼 만하다는 살아있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 같아 좋아.

다리가 긴 남자가 골똘히 담배를 피우며 

햇살 아래 휘적휘적 걸어가는 뒷모습이 좋아.

그런 남자를 보면 미행하고 싶어.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보고 싶어.

하늘로 뻗은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좋아.

춤에 깊이깊이 몰입하다 숨 고르고 서 있는 희열에 찬 춤꾼 같아 보여 좋아.

바다 너머 수평선을 바라볼 때 문득 밀려오는 핑 아득해지는 느낌 좋아.

조여진 허리끈이 탁 풀어지듯, 나도 몰랐던 온몸의 긴장이 확 풀어지는 것 같아 좋아.

집 앞 도로에 차들이 내는 부르릉 낮은 진동으로 지나는 느낌이 좋아.

그럴 땐 흔들흔들 기차 타고 어디로 가는 기분이 들거든, 내 집에 있으면서도.

<노팅힐>의 스파이크 같은 엉뚱남 게이 친구가 있으면 좋겠어. 

<뜨거운 것이 좋아>의 다프네 같은 사랑스러운 남자 친구가 있으면 좋겠어.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을 것 같아 좋아.

강아지들이 단잠에 빠져서 내는 웅얼웅얼 입맛 다시는 잠꼬대 소리 좋아.

그 평화로운 꿈속으로 들어가 나도 들어가 있고 싶어져. 

산책길에서 만난 강아지가 내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다가올 때가 좋아.

금방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좋아. 

햇볕 환한 날 운동장을 지나가는 까만 새의 그림자 좋아.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동물의 까만 실루엣을 보는 건 좋아.

동물들도 세월을, 자기 존재를 묵념하는 듯한 장엄한 느낌이 들어 좋아.

글을 쓸 때 생각지도 않은 단어나 문장이 나왔을 때 좋아.

그럴 땐 내 안에 보통 때 나보다 더 큰 사람이 들어있는 것 같아 좋아. 




* 이번 그림에세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장 피에르 주네'의 데뷔 단편영화인 <쓸모없는 것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쓴 글. 쓸모없는 것들이 우리를 구할 거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싶어서다. 


* 영화 <쓸모없는 것들>를 볼 수 있는 곳 - http://blog.naver.com/chelzzang/20045792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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