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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이다 Mar 18. 2022

시청역과 종각역 사이는 길다

그림에세이(4)

다음 역은 종각역이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이번 역은 내가 내려야 할 곳이었다. 달리는 지하철 너머 어둠이 흘러가는 저쪽 바깥 풍경과 형광등 불빛이 고여 있는 이쪽 내부 광경이 유리창에 동시에 어려 있었다. 유리창에 어린 풍경은 검은 바탕에 옅은 실루엣이 살짝 도드라져 보이는 암각화 같았다.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 채 묵상하듯 잠잠히 앉아있는 할머니, 배낭을 강아지처럼 끌어안고 졸고 있는 여중생, 무릎 위에 책을 올려놓고 꾸벅대는 아저씨의 모습. 덜컹덜컹, 규칙적인 열차 바퀴 소리를 배음으로 오후 3시의 나른함이 차창 위로 가볍게 스케치 되어 흘러가고 있었다. 


유리창에 시선을 두고 나란히 서서 좌석 위의 손잡이를 잡고 가던 친구와 나는 방송이 끝나고 고개를 돌려 서로 바라보았다. 먼저 내려야 하는 내가 먼저 나 갈게 인사하며 웃고, 친구도 그래 잘 가 인사하며 따라 웃었다. 눈꼬리가 처지고 입꼬리가 올라가는 미소의 시작점은 달랐지만, 끝점은 거의 같았다. 내가 네게, 네가 내게 한번 웃어 보였다는 걸 확인하곤 친구는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뜨렸고, 나는 내려야 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같은 과, 같은 학번의 동기간으로 묶여 지내게 된 사이라 서로 마주 보고 있기도 어색하고, 그렇다고 앞으로 종종 같은 시간, 같은 과목을 함께 들을 동기간에 먼 산만 바라보고 있기도 어색한 상황이었다. 낼모레에 제출할 리포트 걱정을 나누고 나자 함께 화제 삼을 이야기가 동나고 말았다. 집에 어디냐, 어느 고등학교에 다녔느냐, 무슨 교양과목을 듣느냐 등의 뻔한 질문은 이미 지나쳐왔던 상황. 지금 누굴 만나러 가느냐, 남자친구가 있느냐 등의 얘깃거리가 풍부한 사적인 질문을 아직은 이른 사이. 그런 애매한 관계에서 나눌만한 부담 없을 이야깃거리를 찾아 머리를 굴리던 중이었다. 그러든 찰나에 들려왔던 종각역 도착 안내방송은 괜한 해방감마저 느끼게 해줬다. 


그런데 헤어지는 인사를 나눈 후 지하철의 운행속도는 느려지기 시작했다. 오로지 달리기에만 매진하던 양 덜컹덜컹 틈 없이 달리던 지하철이, 마치 딴생각에 팔려 넋 놓고 달리는 것인 양 덜커덩덜커덩 한없이 늘어진 가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열차 운행방향이 급격하게 휘어지는지, 내 몸도 덩달아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서로 잘 가라고 인사를 이미 나누었는데, 누가 하나 자리에서 뜨지도 않은 채 여전히 바짝 붙어 나란히 서 있다 보니 친구와 나 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함은 곱절로 더 커지고 있었다. 왠지 지하철 문이 열려서 나 이번에 진짜 간다고 손을 흔들기 전까진, 서로 눈을 마주치거나 대화를 나누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이미 둘 사이에 꺼내놓은 작별인사가 유효한 마당에서, 다시 눈을 마주치거나 이야기를 나누면 뭔가 작별게임에서 반칙을 저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색함에 괜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배낭을 고쳐 매고, 그것도 모자라 양쪽 구두코를 번갈아들어 올려 구두상태를 살펴보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지하철은 여유만만 느릿느릿 제 속도로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드디어 친구가 침묵을 깨뜨려줬다. 어색함을 억지로 견디느니 차라리 괜한 소리를 늘어놓는 뻔한 사람이 되길 결정한 듯이. 


“역시, 시청역이랑 종각역 사이는 길다. 그치?”


그랬구나. 여기 구간은 원래 유독 긴 구간이구나. 난 그때 처음으로 시청역에서 종각역 사이 구간을 타고 가던 중이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았기에, 서울역에서 학교 지하철까지 혹은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학교 지하철까지 다녀본 게 다였던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제 알아가고 있는 서울 친구에게 서울이란 곳에 마냥 무지한 내 촌스러운 구석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이고는 살짝 웃었다. 그리곤 잠시 후, 드디어 열차는 종각역에 다다랐고 이제 나 진짜 간다고 친구에게 재빨리 손을 한번 흔들어보이곤 냉큼 열린 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마냥 서먹서먹했던 공간으로부터 작은 탈출을 할 수 있었다. 괜한 안도와 해방감이 밀려왔다. 출입구 올라가는 계단을 가기 전에 이제 막 출발하는 열차 안을 설핏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친구의 모습도 한결 편안해 보였다. 어느덧 그 친구도 오후 3시의 나른한 풍경의 한 조각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후에 알게 된 사실은, 지하철로 시청역에서 종각역까지 도착하는 데 단 3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날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애매한 친구와의 서먹서먹했던 동행이, 시청역에서 종각역까지 단 3분의 거리를 마치 30분 이상인 것처럼 길게 느껴지게 했다. 그래서일까. 사실 그 친구와는 학교 다니면서 가까워질 기회가 없었다. 그냥 같은 과 동기 정도의 사이로 머물다 졸업하고 각자 사회로 나갔다. 졸업 후 우연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다른 친구들을 통해 그 친구의 소식을 접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고, 그 사이 세월이 이삼십 년 넘게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그 친구의 그때 그 모습, 그 이름은 지금도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한다. 졸업 후 연락이 끊긴 다른 동기들 몇몇은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한데도 말이다. 


지금도 지하철 1호선 시청역과 종각역 사이 구간을 지날 때면 종종 그때의 그 친구 얼굴이 떠오른다. 그때 그 친구와 함께 느꼈던 서먹서먹했던 강렬한 정서가 아직도 그 친구를 또렷하게 기억하게 하는 듯하다. 누군가와 함께했던 시간이 너무나 어색해서 당황스럽기까지 했던 그때의 막막한 기분, 그 마음은 내 생애 처음으로 느꼈던 ‘타인과 함께 있음’의 온전한 경험이었던 것 같다. 너무나 어색하고 서먹서먹했던 덕분에 이삼십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어도 나는 아직도 그 대학 동기를 또렷하게 가슴에 간직할 수밖에 없나 보다.


1990년의 1호선 종각역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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