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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에르쥬 Jun 28. 2024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고양이의 비극적인 삶

별고나 2024년 6월 28일 금요일

반려동물의 삶은 그야말로 극단적이다. 고양이만 하더라도 길고양이와 집고양이의 묘생은 너무나도 다르다. 한 때 나는 길고양이의 삶을 지옥으로, 집고양이의 삶을 천국이라고 표현했지만 가용성 휴리스틱으로 인한 섣부른 결정화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집고양이였지만 6년이라는 짧은 삶을 살고 간 뀨의 삶을 두고 천국이니 지옥이니 평가하는 건 참으로 오만한 짓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라는 인간은 평소 뀨에게 천국 같은 곳에 살고 있고 행복한 줄 알아라는 식으로 생색만 내는 어리석은 존재였다. 먹성 좋고 에너지 넘치고 애교 많던 모습을 보고 너무나도 건강하다고 생각했고 15년 아니 20년도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상 신호가 있었다는 걸 감지하고도 애정을 받고 싶어서 칭얼된다는 식으로 묵과했고 검색 결과 그와 같은 사례가 있다는 걸 보면서 자기합리화했다. 그 결과 이와 같은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다. 예상치 못한 급사라는 표현 자체가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순화적인 표현일 뿐 인과를 따져보면 충분히 예상된 수순이었고 쉽고 편하면서 익숙하다는 가장 큰 위협에서 벗어날 수만 있었다면 충분히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처음 고양이를 키울 때의 초심을 유지하지 못한 것인데 결국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고양이의 비극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기 전에 유독 나한테 살갑게 대하고 격렬하게 스킨십을 했던 건 결국 뀨의 이별 인사가 아니었을까... 죽기 전에 나를 계속 쳐다보면 그 눈빛이 아직도 너무 기억이 난다. 나와 함께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으니 치료해 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갑자기 찾아올 수 있는 죽음을 순간을 담담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2024년 3월 9일 뀨가 세상을 떠나고 다음 날 어머니와 함께 화장을 하러 갔다. 그 당시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반려동물 장례 서비스를 통해 화장할 수 있는 곳까지 기사님의 차량으로 이동했다. 원래는 뀨를 상자 같은 곳에 담아서 가려고 했는데 이제는 뀨와 진정한 이별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올 거라는 생각이 들 내 무릎 위에 올려놓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은 지 하루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뀨의 몸은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기적처럼 뀨가 예전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1시간 30분 정도 이동하면서 점점 사라졌다. 


너무 큰 슬픔에 휩싸여 있던 내 모습을 본 기사님께서 말문을 여셨다. 이와 같은 일을 해보면서 다양한 사례를 본다는 것이다. 어떤 할머니는 고양이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해서 죽은 채로 한 달 정도 같이 살다가 결국 지인의 발견으로 마지못해 화장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화장터로 가면서 할머니의 몸이 덜덜 떨리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하는데 그 고양이는 할머니에게 가족 이상의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급 나누고 편 가르면서 조건을 따지는 인간은 애증의 존재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고양이는 독립적이면서 조건을 따지지 않고 동등하게 바라보니 그게 바로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다양한 이야기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반려동물을 키울 여력이 없어서 강제적으로 안락사 후 화장을 하는 케이스였다. 경제적인 이유일 수도 있고 알레르기와 같은 건강상 이유일 수도 있지만 집고양이 입장에서 보면 동고동락하던 인간의 결정으로 인해 한순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남을 죽이거나 해코지한 적도 없는데 사형수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참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마음을 안타깝게 만드는 건 정작 고양이를 키우기로 결정한 사람은 차량에 동승하지 않고 고양이만 태우고 간다는 것인데 기사님은 뒷좌석에서 초연하게 바라보는 고양이의 눈빛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마치 도살장에 가는 소나 돼지처럼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다는 얘기를 하셨다. 모든 걸 다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고양이의 눈빛을 두고 인간은 요물이라고 부르지만 자기 합리화로 일관하는 인간이야 말로 지옥을 만들어 내는 괴물 같은 존재라고 여겨진다.


아마도 기사님께서는 슬픔에 빠진 나를 위로하기 위해 비극적인 사연을 가진 고양이들의 사례를 얘기한 게 아닐까 싶다. 그에 비하면 뀨는 6년의 시간 동안 행복한 묘생을 살다 갔다는 식으로 일종의 위로를 돌려서 전달하고자 한 것 같다. 하지만 이와 같은 우열 가리기 식의 비교는 죄책감을 덜기 위한 달콤한 속삭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이 다를 뿐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고양이의 비극이라는 결과는 다를 게 없다. 법륜스님의 말씀 중에 "인생이란 원래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죽음과 같은 되돌릴 수 없는 결과는 여기에 통용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만약 뀨가 되살아날수록 있다면 시지프스의 형벌을 받더라도 희망을 가진 채 고된 일도 되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난 일이다. 미약한 인간이기에 매일 추억에 사무쳐 후회하며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내가 스스로 나한테 형벌을 내린 것과 다름이 없어 보인다. 


인생이란 원래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결혼할 때 삶이 이리될 줄 알았나요?

애를 낳으면 잘 될 줄 알았지

저리 속 썩일 줄 알았나요?  

우리는 원하면

그게 다 이루어질 거라고 믿고

다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원하는 대로 될 수도 없고,

원하는 대로 된다고 좋은 것도 아닙니다.  

쥐가 쥐약을 먹으려고 발돋움했지만

발이 닿지 않아 못 먹었다면

좋은 일이지 나쁜 일이 아닌 것처럼,

우린 사실 어떤 일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잘 모릅니다.  

다만 원하는 일이 있으면 할 뿐이고

안되면 다시 하고,

그래도 미련이 남으면

한 번 더 하면 될 뿐이지

괴로워할 일이 아닙니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세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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