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샌드위치

-속을 열어보지 않아도 잘 보여주는 착실한 B런치-

by Who am I

내가 좋아하는 음식 가운데 하나는 샌드위치다. 어쩌면 편의점 진열장에도 있는 이 삼각형 빵은

너무 흔하지 않은가? 하지만 너무 '흔한' 그 샌드위치를 생각한다면 '진짜' 샌드위치를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샌드위치는 일반명사일 뿐. 속재료나 만드는 방법에 따라 100가지의 샌드위치도 생길 수 있는 것.

겉을 감싸고 있는 두 개의 빵이 도화지라면 그 안에 그릴 수 있는 그림이 무궁무진하다.


아주 드물게 가끔 너무나 내용에 충실한 샌드위치를 만나곤 한다. 대부분 샌드위치가 감추고 있는 속을 보면 양상추와 머스터드 그리고 햄 치즈 토마토 연유나 마요네즈 정도. 하지만 그때 그 베이커리에서 만난 샌드위치는 특별했다. 안에 올리브나 양파 피클 같은 것을 잘 다져 넣었던 것 같은데 내가 감지하지 못한 제3의 재료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일일이 셀 수는 없지만 신기한 자료들이 매우 정성스럽게 칼질이 되어 빵에 담겨있어서 놀랐던 것. 나는 속으로 돈을 주고 사 먹는 음식의 의미는 이런 것이구나 느꼈다. 집에서는 내가 도저히 구현할 수 없는 단순하지만 충실한 재료들의 긴장감 있는 조합. 나는 이 작은 빵에게 경외감을 느꼈다.

계란과 감자가 들어간 메뉴도 흔한 것이긴 하지만 마치 마법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뭔가 달랐다.

그래서 나는 평범하지만 속이 다른 그날의 그 작은 빵을 사랑했다.

사람으로 치자면 부드러운 빵 속에 내공이 빵빵한 그런 인물 같은 느낌이었다. 거기다가 삼각형으로 반듯하게 잘 잘린 단정한 단면. (샌드위치는 속재료가 잘 보이게 그러나 흐트러지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 속에서 몇 번인가 샌드위치를 언급한 적이 있다.

한 번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한 번은 <댄스 댄스 댄스>에서.

그는 의외로 샌드위치를 이야기하면서 칼의 중요성을 언급하는데. 샌드위치를 만드는 요소 중에는 질이 좋고

고급인 마요네즈와 겨자. 신선한 재료. 탄력이 살아있는 빵 못지않게

날카롭게 한 번에 잘 잘리는 칼이 꼭 있어야 한다는 것.

재밌는 것은 이 샌드위치의 이름이 오이 샌드위치인데, 그만큼 기본에 충실하다면 화려한 속재료도 필요 없이 신선한 오이와 햄 한 장 만 있어도 괜찮다는 것.

(나는 실제로 궁금해서 흰 빵에 오이와 머스터드와 약간의 마요네즈만 넣어서 만들어본 적도 있었다.)


착실한 샌드위치가 충실한 내면을 가진 반전 인물이라면, 의외의 속재료를 품고 놀라게 해주는 그런 유형도 있다. 아보카도 혹은 연어 혹은 초콜릿 같은. 실제로 아보카도 샌드위치는 일본 여행 때 요코하마에서 실수로 주문한 메뉴였다. 샌드위치를 파는 직원은 아무리 내가 샌드위치를 설명해도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고는 결국 자기가 멋대로 주문을 넣어버린 것. 그렇게 나온 결과물을 받아 들고 부둣가에 앉아 처음으로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먹었는데! 웬걸. 너무 괜찮은 맛이었다. 마치 무작위로 간 여행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르고 떠났던 것처럼. 아보카도 샌드위치는 생긴 것과 달리 반전의 맛이 있었다. 그것도 샌드위치의 매력 중 하나랄까.


첫째 딸은 샌드위치를 좋아한다. 야채를 좋아하지 않는 아이지만 양상추와 토마토 야채가 풍부하게 들어간 샌드위치를 찾는다. 언젠가 햄과 치즈 그리고 연유가 들어간 대만식 샌드위치를 사준 적이 있는데.

"내 취향이 아니야"라고 답변했다. 둘째는 달달하고 고소한 그 맛이 최고라지만.


취향이 밥 먹여주냐.


취향은 확실히 주관적이고 확고하다. 그것을 논박할 근거는 없다. 대만식 샌드위치를 좋아하는 둘째와 야채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좋아하는 첫째가 서로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은 없다. 서로 인정하고 사는 수 밖엔. 그런 일로 밥 상 앞에서 싸우기엔 세상이 너무 복잡하다. 하지만 취향의 문제는 생각보다 뿌리가 깊은 것이다.

그건 본질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같이 살아갈까에 대한 기본적인 의식구조에 기반해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방식으로 먹는데, 저 사람은 저 방식으로 먹어서 단지 그것 때문에 기분이 나쁜가. 아니면 그것도 그 사람의 일부이니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가.


어제는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 가>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수많은 TED 강연이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몇 안 되는 최고의 강연이었다. 그분의 말씀 중에 다름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는데. 알랭의 견해에

따르면 결혼을 앞둔 사람에게는 '사랑받는 느낌'보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더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니 서로의 다른 취향이라도 받아줄 수 있는 그릇이 결국은 행복한 관계를 만든다는 것.


그래도 솔직히 나는 아직도 내가 중요한 사람이어서 그런지. 내 문화권에서 만난 남자가 그래도 편하다고 느낀다. 신혼때는 서로 다른 음식취향에 맞추는 것이 정말 힘들어서 싸운적도 있지만.

(남편은 내가 끓여준 미역국 대신 스팸을 깠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이후다 나는 이 분이 인생에서 얼마나 맛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게되었다.)

만약 매운 양꼬치를 좋아하는 친구. 취두부를 좋아하는 친구. 마라탕을 좋아하는 친구. 술을 좋아하는 친구를 만난다면 과연 친해질 수 있을까. 취향은 가끔씩 생존의 문제도 만들어주니까 말이다.아무런 이성적인 이유도 없이.

당신을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다는 것.

그래도 우린 서로 다르기에 기억하는것


이미지 출처: 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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