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 me be alone

-마음의 거울을 보려면-

by Who am I

MBTI에 묻지 않더라도 나는 나 자신이 내향인임을 알고 있다. 내향인/외향인이란 단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느냐의 단순한 질문에 답할 정도로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아주 극명하게

대다수가 모인 사교클럽이나 파티 공공행사 등등에서 나 같은 내향인은 에너지를 뺏기는 느낌이 든다.

좀 더 심하게 말해서 기가 빨리는 것 같고 집에 오면 그저 자고 싶어 진다. 어릴 때는 학교의 단체 행사나 공식행사에 있으면 나는 장소에는 존재하지만 어떨 때는 내가 그곳에 왜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강단에서 말하는 누군가의 언어는 그저 귀를 스치는 정도였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경향은 정말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든다. 주말에 뭔가 거한 행사가 있은 뒤에는 월요일이나 화요일이 지나서 수요일이 되어서야 나 자신으로 작동하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들은 주말에 파이팅 넘치게 외부활동을 치르고 다시 월요일에 현실로 돌아오면 도무지 주말에 쉰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아마 출근을 했었어도 회사에서 월요일에서 화요일 오후까지는 영혼 없는 상태로 겨우겨우 업무만 처리했을 듯싶다.

그러니 (정말 어쩔 수 없이) 자연이 만들어준 나의 성격 대로 프리랜서로 살게 되어 혼자 작업을 하게 되면 보통 월요일 정도는 상태를 조율하려고 가급적 사람을 적게 만난다. 전화도 하지 않고 카톡이나 채팅도 하지 않는다. 사실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과 무얼 해도 잘 맞지 않는다. 그들도 아마 '어' '어'로 대답하는 내가 피상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나는 주파수가 안 맞는 라디오처럼 하루종일 오작동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조용히 생각하다 보면 마치 연못에 내 얼굴이 떠오르는 거나 거울 속의 나를 비춰보는 것처럼 서서히 남아있는 영상처럼 조금씩 떠오른다. 나는 그 느낌에 집중한다.

나에게는 그것이 직관이고 통찰력으로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본질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나는 며칠을 마음속에 떠돌던 양심이라는 말. 같은 현실을 겪고 같은 상황을 보아도 늘 내 마음에 떠올랐던 말. '양심'이라는 말을 다시 새기면서 나는 그 말의 본질적인 뜻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에 등장하는 쇼타. 그의 가족들은 절도를 정당화하면서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깨달으며 가족이 해체된다


첫 번째 [양심]은 남들이 보는 눈이 없어도 나에게 남아있는 도덕성의 양이다. (비슷한 말로는 수치심이 있지만 수치심에는 좀 더 감정적인 점과 고통의 그림자가 녹아있다) 그런데 이 양심이 움직이는 작동방식이 어떤 것이냐가 사실 굉장히 중요하다. 어쩌면 수많은 사건의 키를 갖고 있는 '양심'이 진가를 발휘하는 것은 경찰 서가 아닐까. 사실 타인이 나를 보고 취조하는 과정에서 질문하는 방식에서는 절대 작동하지 않는다는 거었다. 보통은 방어기제라는 게 작동하기 때문에 아무리 범죄자라도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구속영장을 받는 날 기자들이 마이크를 들이대며 "피해자에게 죄송하지 않습니까?" 같은 질문을 해도 별다른 대답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잠바를 뒤집어쓰고 마스크를 쓰고라도 "죄송합니다"라고 말을 하는 사람은 그나마 나은 편인 건 그 때문. 내가 모르는 미안함이 대체 남에게 어떻게 진심으로 다가올 수 있으며, 스스로 미안하다고 말조차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얕은 내면의 깊이를 대체 누구 탓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양심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혼자 있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감옥의 시간은 처음에는 타인에게 비난하는 방향으로 격렬하게 치닫다가 본인에게로 질문하는 방향으로 돌아간다.

타인이 아닌 자신의 얼굴을 보기 위해선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루하거나 심심하다거나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집중하는 것뿐. 거기에는 분명 중요한 답이 있다. 그건 사람을 움직이는 작동기제가 사실은 외부의 키가 아닌 내부의 작동원리에서 시작된다는 중요한 깨달음과도 닿아있다.

두 번째로는 양심이 존재의 유무가 아니라 양심의 타이밍과 정도이다. 드디어 누군가가 자신의 양심의 존재를 깨달았다 치더라도 그것이 현장에서 잘 작동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보통은 사건이 터지고 난 후회의 차원으로 작용하는 데, 이럴 경우 사건과는 별개로 감정싸움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든 자기 자신을 보존하려는 차원에서 가장 본능적이고 안전한 선택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 그것은 후에 생각이 돌아온 후에 '자기가 대체 왜 그랬는지'.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칫 이에 대해 자책감을 갖기 쉽고, 타인에 대해서는 무차별적인 폭언을 하는 경우도 존재하지만 사실 별 의미 없는 싸움일 뿐이다. 자기를 중심으로 좌표가 설정되어 있고 자기가 어느 정도 선을 벗어났는지 즉각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본인의 도덕적 민감성이 단련이 되어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민감성이 둔하면 단지 타인을 기준으로 무차별적으로 따라가기 쉽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비교대상이 정답은 아니기 때문.


당신이 내향인이든 외향이든 정말 불가피하게 혼자 있는 시간이 생긴다면 딱히 스마트 폰이나 영상매체를 찾는 대신 그 시간을 본인 만의 것으로 아주 잘 써보는 것도 필요하다. 거기에는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다른 누구의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고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 말이다. 모두가 찾는 대답은 양심의 언어이다. 문학은 그 길의 한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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