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는 외국인들이 많다. 국적도 다양하다. 러시아 중국 태국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등. 이보다 글로벌할 수 없다. 이 도시의 절반은 한국인이고 절반은 한국에 일하러 온 노동자들이 반인데 도시의 반을 나누어서 구도심에는 외국인들이 신도심에는 한국인들이 주로 모여 산다. 이용하는 마트, 학교 생활시설도 각각 다르다. 그럼에도 이 도시의 지역 경제는 두 축이 서로 상생하며 돌아간다. 이 동네에서 제일 큰 대형마트는 한국인 주거를 중심으로 제일 가운데 자리 잡고 있지만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싼 편이라,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고 물건이 많은 식자재 마트에 사람들이 많이 들린다. 식자재마트는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각종 식자재를 배치해 놓고 다른 한쪽은 식당에서 쓰는 식재료를 대량 납품하고, 다른 한쪽은 한국인 소비자들을 위한 저렴한 상품들을 구비해 놓는다. 가격을 낮추고 싸게 팔기 위해서는 많이 팔아야 하고 그 수요를 한국인들만으로는 채울 수 없다. 외국 음식을 사는 외국인들의 수요가 그 절반을 지탱하니 상대적으로 한국인들도 낮은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다. 덕분에 보통 한국마트에서는 찾기 어려운 각종 외국음식을 구경하다가 한 번쯤 사서 먹는 것도 친숙해졌다. 상표만 봐서는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 음식들도 꽤 있지만 말이다. 이제는 마트에 가면 한국인 보다 외국인들을 더 많이 보는 게 익숙해졌다.
동네의 현지 맛집들
살면서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을 가본 적은 없지만 동네에서 이들 음식을 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서울에도 외국 음식 프랜차이즈들이 흔하게 있지만, 보통은 한국인 고객들을 대상으로 한 음식들이라 가격도 꽤 비싸고 맛도 보통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곳에서는 말 그대로 사장님도 외국 사람이고 간판도 베트남어나 태국어로 걸고 영업하는 곳들이 많다. 외모만 좀 다르게 생겼을 뿐 한국인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는 분들 말이다. 덕분에 외국어 한번 안 쓰고 베트남 사장님이 직점 만들어 주는 반미도 먹어보고 쌀국수 보다 더 신기한 국수종류들도 먹어보고 태국요리, 터키음식도 먹어보았다. 텔레비전에서 나온 것처럼그렇게 화려하진 않지만 좀 더 현실적인 버전과 가격의 음식들 말이다. 그래도 뭐 현지에 가본 적이 없으니 내가 먹은 음식이 정확히 그 나라 맛인지는 알 수 없다.
한국에서 빵 문화가 유독 화려한 이유는
주말에는 남편과 함께 두 군데 빵집을 들렀다. 한 곳은 요즘 유명하다는 베이커리 카페였다. 입구에 들어서자 각종 화려한 빵에 두 눈이 휘둥그레 질정도. P사의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보던 그 빵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랄까. 크로와상의 크기나 각종 시럽과 견과류 초코 치즈 토핑이 잔뜩 뿌려진 빵들이 즐비하다. 치즈나 초코가 들어가지 않은 빵이 거의 없을 정도이고, 드레스를 입은 사교계파티에서나 등장할 법 한 각종 디저트들이 진열장에 빛을 받으며 나란히 세팅되어 있었다.
아낌없이 재료를 쏟아부은 그 빵들은 가격도 일반 빵집의 2배나 3배쯤은 될 정도. 하지만 나는 달고 짠 빵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진열장을 몇 바퀴 돌아보다가 겨우 딸을 위해 소시지 빵을 하나 골랐다. 유명하다는 소금빵도 하나 간신히 골랐다. 한국에서 빵을 먹는다는 것은 이렇게도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문화의 일부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아이와 남편 아이까지 해서 차 음료와 빵을 먹는데 쓴 돈이 5만 원. 여기에는 외국인은 없다. 대부분 나이가 지긋이 있는 중년의 한국인들이 차를 타고 와 느긋이 차를 즐긴다.
빵이 밥인 이유
성질급한 빵순이가 한 입 먹은 방석빵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집 근처 동네 시장에 들러 일명 방석빵(밤식빵 아님)이라는 걸 샀다. 발안 만세시장 초입에는 현지인이 직접 만든다는 레표시카 일명 러시아 국민 주식이라는 빵을 판다. 하나에 4천 원인 이 빵은 지름이 거의 28인치 프라이팬과 맞먹과 무게가 1.2kg에 달하는데, 그나마도 3천5백 원에서 4000원으로 인상한 것이라고 한다. (키르기스탄 현지에서는 천 원에 판다는 말도 있다). 외국어 간판이 쓰인 가게에 들어가니 사장님이 능숙한 한국어로 인사를 하고 빵 사러 왔다고 하니 아직도 따뜻한 빵을 비닐봉지에 싸준다. 우리는 아직도 온기가 남은 빵을 핫팩대신 딸의 가슴에 안겨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잘라서 지퍼백에 넣고 한동안 밥대신 계속 먹었다. 맛은 뭐 이렇다 할 자극적인 것이 없는 담백한 맛. 약간의 커민이 들어가고 참깨가 들어가 고소하긴 한데 쫀득하고 어디에 곁들여 먹거나 찍어먹어도 어울리는 식사빵이었다. 보통 빵을 사면 다음날은 질리는데 내가 싫어하는 그런 면이 없다. 식빵이나 모닝빵과도 다르다.굳이 말하자면 부드러운 떡 같기도 하고 밥 같기도 한 맛이다. 그래서 계속 먹게 되는 이상한 맛. 예전에 베이커리에서 오랜만에 바게트를 발견하고 반가워서 사다가 일주일을 먹었을 때도 그랬다. 세끼 밥을 먹을 때처럼 거부감이 없다. 특별한 맛이 없는데 계속 들어간다. 울 엄마는 무조건 한국사람은 밥이 최고라는데 말이다.
아마 프랑스인들도 디저트 먹다가 집에 돌아오면 세끼 밥 같은 바게트를 매일 먹고, 러시아 인들도 집에 돌아오면 레표시카 같은 빵을 매일 먹으면서 살겠지. 이런 빵에는 왠지 일상의 맛이 곁들어 있다. 그래서 한국인이 외국에 나가면 밥 생각하듯. 이들도 아마 레표시카를 먹으면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래서 만세시장 그 빵 가게 앞에는 고국에서 공수해 왔다는 화덕이 놓여있다.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누군가의 주식을 매일 만들어내는 엄마의 밥공장 역할을 하듯. 매일 구워내는 빵은 주말엔 200개씩도 팔린다 한다. 오직 레표시카만 굽는 그 가게가 200인분의 밥을 짓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집에 돌아와 지퍼백에 작게 잘라 담은 뒤, 잼에도 발라 먹고 발사믹 식초와 올리브 오일에도 찍어먹어 보았다. 랜치 드레싱 같은데도 찍어 먹어보고 베이컨이나 계란을 넣어서도 먹어보았다. 어디에다 먹어도 무난한 게 어울렸다. 원래는 그릭 요구르트같이 꾸덕한 요구르트에 찍어먹는 거라는데 요구르트를 조만간 사서 찍어봐야겠다고 생각했지. 마치 흰 밥이 어느 반찬에나 어울리듯 말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모든 요리에 밥을 말아먹고 볶아먹고 비벼먹듯 말이다.
생각해 보면 쌀을 먹는 일본이나 중국 한국 아시아를 제외하고 유럽부터 중앙아시아 중동까지도 커다란 '빵을 나눠먹는' 문화가
흔하다. 가톨릭 성당에서도 미사 때 예수님이 빵을 갈라 제자들에게 나눠주고 포도주를 마시는 장면이 재연되는데 이런 성찬의 전례 뒤에 신자들에게 축성된 밀떡을 하나씩나눠준다. 이 떡은 사실은 얇은 전병 같은 느낌인데 영어권에서 브레드가 한국에 와서 이해하기 쉽게 떡으로 불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영혼의 밥을 먹이는 예식을 가톨릭 교회에서는 매일 미사로 재연하는 것.유대인들도 안식일에 특별한 빵을 만들어 나누어 먹으면서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했던 그 기억들을 재생한다. 그 따뜻하고 친숙했던 공동체로서의 기억말이다. 한 자리에 앉아 나누어먹는 문화는 너와 내가 같은 생명을 나눈 사람이라는 의미도 전해준다
우리 집 큰 딸은 딱히 밥을 좋아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면을 즐겨 먹는데 오늘따라 배고픈 다해서 떡국을 끓여주니 밥을 말아먹겠다고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김이 나는 하얀 밥을 먹던 딸의 얼굴에 웃음이활짝 핀다. 하얀 밥 맛있어? 어. 그래. 진짜. 평소에 이것저것 다양한 반찬을 해주었을 때도 잘 안 웃더니 하얀 햇반 한 그릇에 이렇게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니 신기하다. 그래 밥이 주는 행복이 이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