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저너리 Aug 06. 2018

[에세이 19]  ‘아니오’라는 선택지가 생긴다는 것

[정인의 크루 에세이]


학교를 다니다 보면 가끔 선생님을 좋아하는 애들이 있다.

대학교에서 선망하던 교수님을 존경한다거나, ‘강의’라는 커리큘럼에서 누군가에게 경외심을 품는 것이 아니라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며 그냥 선생님을 좋아하는 애들.


편견일 수 있지만 사실 우리 세대에서는 선생님을 좋아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학교에서 배워야 했고, 규칙을 지키면서도 뒤떨어지면 안 되었으며 원만한 교우 관계를 유지해야 했기에 선생님은 ‘가르침을 주신다’기 보다는 ‘잘 하는지 검사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어릴 적부터 선생님들을 참 좋아했다.      


나의 이 ‘선생님 사랑’은 특히 초등학교 때 극심했는데 우리 엄마 연배의 베테랑 선생님부터 지금의 내 나이 정도의 신임 선생님까지 그 우열을 가리지 않았다. 엄마 아빠 이름도 겨우 외우던 1학년 때, 공개수업에서 ‘가족 소개를 해 볼까요?’라는 질문에 번쩍 손을 들고 우리 아빠 입맛까지 줄줄 발표하는가 하면 머리가 좀 큰 4~5학년 사춘기에 친구들이 선생님 험담을 하다가 ‘야 근데 너는 담임 좋아하잖아?’라고 눈총을 받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우리 식구들 모두 아직도 그 냉랭함과 잔인(?)한 교육방식에 몸서리를 치는 초등학교 5학년 담임선생님조차 그 당시에는 좋아했던 걸 보면 참 어지간한 열병에 빠졌었구나 싶다.   



찾아가는 은사님은 안계서도 사랑했던 은사님은 그렇게나 많았다. 벗어날 수 없던 콩깍지...



   

나는 왜 그렇게 선생님을 좋아했을까?     


그 어린 나이에 선생님과 마음이 통하는 진실한 대화를 나누었을 리도 없고 기껏해야 묻는 거라고는 ‘선생님 어제저녁 뭐 드셨어요?’ 정도인데 나는 어디서 친구들보다 단단한 관계의 고리를 찾았던 걸까?

얼마간 이 질문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다 보니 선생님들에게 남아있는 가장 강렬한 기억은 ‘칭찬’이었다. 숙제를 잘 해왔다고, 반장으로 반을 잘 이끌었다고,  영어 시험에서 유일하게 100점을 맞았다거나 리코더를 조금 잘 불었다거나 하는 소소한 것들이 내게는 특별했다. 그 칭찬에 순간들에 선생님이 남은 모르는 나의 진가를 알아주는 것 같아서.





각 반의 요정들은 복도에서 마주치면 프로페셔널하게 서로를 바라보곤 했다.


그래서 매년 1학기 중순쯤 되면 선생님들이 관례처럼 두는 ‘심부름 요정’의 자리를 꿰차는 것이 내 학기 중 소소한 기쁨이었다. 초등학생, 어린 나에게는 엄청나 보였던 갱지의 문서들을 이 반 저 반으로 가져다주거나 ‘출입금지’라고 쓰인 윗 학년 반의 문을 당당히 열고 들어갈 수 있는 프리패스 같은 것이었달까?

그래서 심부름 요정이 된 해에는 “네 선생님~”이라는 대답을 입에 달고서 영화 속에 나오는 똑똑한 엘프 요정들처럼 이 복도 저 복도를 가볍게 뛰어다녔다. 그럴 때마다 bgm으로 ‘정인아 잘 했다’, ‘정인이 덕에 선생님이 한 시름 놨어’라는 달콤한 말들이 내 귀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처럼 행복한 ‘엘프 라이프’도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태도라던가 싹싹함이 지배하던 초등학교와는 달리 중학교부터는 ‘성적’이 우리를 줄 세웠다. 선생님에 대한 사랑으로 학구열을 불태우던 초등학교의 성적은 점점 화력이 다해갔다. 성적이 좋은 학기에는 사랑받을 수 있었지만 아닌 학기에는 모든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고 적성이 안 맞는 과목을 공부하는 괴로움이 선생님에 대한 애정을 뛰어넘기 일쑤였다.       


그렇게 선생님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가지던 ‘엘프 정인이’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전설 속의 동물처럼 사라지고 그럴수록 나의 특별함을 알아주는 존재는 적어져 갔다. 친구들이 말하는 ‘좋은 친구’로는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를 채우지 못해 복도를 걷는 걸음은 더 이상 활기차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교복과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돌아보는 아득해져 버린 이 긴 이야기,

나의 긴 초등생활이 내게 남긴 것은 ‘사랑받기’ 위한 자세’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다.    

   

심부름 요정이자 선생님의 총애를 받던 나는 '아니오 ‘를 모르고 자랐다.  

누군가 내게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봐도,

내가 모르는 것을 아느냐고 물어봐도,

가장 많이 들었던 ‘괜찮니’라는 물음에도      


나는 항상 ‘네’라고 이야기했다. 


나의 머릿속에는 ‘아니오’를 말해서 얻게 되는 자유와 해방보다 ‘네’라는 대답을 통해 얻는 안정감이 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네’에 대한 반문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 짧은 단어를 통해 야기되는 불편함과 그 불편함이 쌓이고 쌓여 이해하지 못하는 골이 깊어져 생기는 양극화의 지점에서 나는 항상 내가 ‘네’라고 대답했던 순간을 돌아봤다.


왜 나는 ‘네’라고 했을까     


그리고 이 고민에 숨겨진 미움받기 싫다, 못하는 약점을 눈에 띄기 싫고 뭐든 잘 하는 사람이고 싶다. ‘도움받는 사람이기 싫다’는 감정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오’를 말하기 어려워하는 나는 어디부터가 문제였던 것일까?



이제 '아니오'의 저주에서 벗어난 것 마냥 너무 자주 아니오를 말해서 고민이다.


이 문제의 시작은 나일까 아니면 나를 둘러싼 환경일까? 이 문제는 사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를 묻는 것만큼 어렵지만 여전히 나를 너무 좋아하는 나는 후자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아니오’라고 말했을 때에도 나를 보는 눈이 예전과 같다면, 아무도 나를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면 이제는 ‘네’보다 ‘아니오’를 더 많이 말하는 나만큼 나 만큼 수많은 세상의 ‘엘프 정인이들’도 편안할 수 있지 않을까?   


        

좋아하는 웹툰 주인공을 내 일 처럼 응원하듯, 모두를 응원하기 [웹툰 '유미의 세포들' 중]



세상에 의미 없는 경험은 없다고 나의 삶의 한 줄기인 이 이야기는 내가 직업관이자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것에 큰 주춧돌이 되었다. ‘네’라는 대답을 통해 차별에 무의식적으로 동의했던 사람으로서 나는 양자를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해받지 못할 거야’라는 내면의 전제로 인해 ‘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조금 더 쉽게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었다. 그 방법이 내가 오랜 시간 고민해 온 사회공헌이든, 아니면 새롭게 관심을 가지는 조직문화이든 어떤 방식으로 건 나는 내가 우선 편하게 ‘아니오’라고 말하는 공간을 꿈꾼다.       


[다름]은 잘못이 아니기에 나는 우리 모두가 자신만의 ‘아니오’를 찾는 순간을 끝까지 응원하고 싶다.




 



안녕하세요 팟캐스트팀의 정인입니다.

많은 크루분들이 내공과 다짐이 가득한 글들로 브런치를 채워주시는 동안 팟캐스트 대본 업무량이 과도하다는 팀원들의 배려와 저의 핑계로 이제야 첫 크루 에세이를 쓰게 되었어요. 상상했던 것보다 개인적이고 말이 많은 에세이이지만 앞으로 다양한 콘텐츠 속에서 제가 비저너리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들을 전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매 스프린트마다 '그런데'와 '아니오'를 말하는 저를 사랑해주는 크루들을 만났기에 내가 반대하는 것이 부정형이 아닌 발전형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 요즘이에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그러한 커뮤니티를 만나기를,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런 하나의 큰 커뮤니티가 되기를 바라며 앞으로 팟캐스트의 대본으로 그리고 비저너리로 우리의 다양성을 응원하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에세이18] 평범한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