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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저너리 Aug 05. 2019

[에세이 60]자신의 분노를 믿는다는 것

[정인의 크루에세이 05. 때로 밀려오는 감정을 어떻게 마주하나요]



당신은 자신의 분노를 얼마나 신뢰하나요?






요즘 가장 자주 마주하는 감정은 분노다.

시도 때도 없이 밀려오는 분노에 어쩔 줄 모르다보면 어느새 하루가 지나있는 일상이 다반사였다. 


회사에서 부당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지인들이 알 수 없는 말과 행동으로 당황스럽게 할 때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낯선 이들의 무례함까지


분노의 원동력이 되는 것들을 도처에 널려있었고, 감정은 불을 기다리는 다이너마이트처럼 분노를 가져다 대면 여지없이 펑펑 터져댔다. 


한 때는 감정 조절에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분노에 가득 차서 쌔한 표정으로 돌아다니기도 했고, 긍정적인 생각이나 기분을 일깨워주는 노래나 글로 감정을 진정시켰다가도 다음 분노에 화르륵 타올랐다. 문제는 이 분노의 불꽃놀이가 내 '속'에서만 터진다는 거였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평온하게 사는지 궁금하고 신기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다 터트리고 사는 건지 아니면 그 상황 상황마다 현명하게 분노를 해소하며 사는 건지 길 가는 사람이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정말이지 매일 나만 미친사람 같았다. 





이렇게 내면으로만 삭히던 분노가 정점에서 폭발한 사건이 바로 미국 여행 중 항공사가 내 짐을 분실했을 때였다. 라스베가스에서 LA로 넘어가는 한 시간 남짓 비행에서 짐이 사라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내 짐이 다음 비행기에 탔으니 오늘 저녁까지는 숙소로 배송해 주겠다는 항공사 직원의 말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여행이면 이런 일도 있는거지' 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당일 저녁, 전화로 꼭 배송해주겠노라 약속한 이튿날 아침, 그날 저녁을 지나 LA에서의 마지막 날로 넘어가는 새벽 한 시를 지나자 내 이성이 폭발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독 추운 날씨 덕에 챙겨온 옷들을 하나도 꺼내입지 못한 것과 이제 겨우 여행다운 여행이구나 라고 생각하던 와중 일어난 짐 연착 사고였기에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었다. 익숙한 번호의 콜센터에 전화해 당신들이 나와의 약속을 몇 번째 어기는 줄 아냐고, 당신들 덕분에 1년에 한 번 있는 내 휴가를 완전히 망쳤다고 그러니까 계속 남 탓 하지말고 이 상황을 해결해달라고. 거의 한 시간이 넘는 전화 끝에 다음 날 아침까지는 반드시 짐을 숙소로 배달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때는 몰랐지, 이 약속도 지켜지지 않아서 마지막 날 유니버셜스튜디오 땡볕 속에서 항의 전화를 하게 될 줄..) 


결국, 짐은 집으로 가는 귀국 항공편을 타러 간 공항에서 받을 수 있었고 짐이고 돈이고 다 가방 속에 들어있던 나는 귀국길에서야 여유로운 여행자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때 참 신기했던 건 확연하게 줄어든 내 분노의 크기였다. 공항에 짐을 가져다주러 온 배송회사 직원과 정확한 보상 체계와 미안하다는 인사를 정상적으로 나눌 수 있는 마음이었고 차분하게 짐을 정리해서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그 후로 한국에 돌아와서도 많은 사람들이 여행 후기를 물을 때, 

여행의 큰 에피소드가 된 짐 이야기를 빼 놓을 수는 없었지만, 예전처럼 화르르 타오르지는 않았고 서 너번 이야기하다 보니 웃으면서 "나 미국 가서 싸움 영어만 엄청 늘었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렇게 편안하게 분노가 해소된 경험이 오랜만이어서일까? 

나는 계속 "왜"를 곱씹었다. 그러다 우연하게 보게 된 글귀. 


읽자 마자 속이 뻥 뚤리던 이야기




이 말을 보고 생각했다. 

"나는 내 분노를 얼만큼 신뢰했을까?" 

돌이켜보면 화가 날 때 마다 생각했다. '지금 내가 예민한건가?', '지금 내 입장만 생각하는건가?' 

이런 질문들이 되풀이되면서 분노에 브레이크를 걸었고 머릿속에서는 불꽃놀이처럼 화가 펑펑 터지는데 그 화를 쉽게 입 밖으로 뱉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번 배송 이슈를 겪으며 느낀 건 내 분노에 대한 확신, 그리고 그 이유를 명확히한다면 그걸 입 밖으로 내뱉는 건 오히려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전화 상담원들에게 여러 번 나의 상황을 설명하며 나는 내가 어느 지점이 불편하고, 어떤 부분은 용납할 수 있으나 어떤 부분을 그럴 수 없는지를 스스로 정당화 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구체적인 분노가 필요했다. '이해할 수 있는 일' 의 범주는 넘어서는 그 한 끗이 무엇인지.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키는 그 작은 불씨가 어느 지점인지를 찾아내는 것은 내가 나의 분노를 믿을 수 있도록, 그리고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가끔 화내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엄청 날카로운 말을 쏟아붓다가 아무일 없는 것처럼 돌아오는 사람들, 혹은 아무 일 없는 것 같았으나 펑 터져버리는 사람들. 그리고 이 예시에는 20대 초반, 예전의 내 모습들이 녹아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내 분노를 신뢰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내 분노가 타인에게 상처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가장 소중한 내 자신에게 폭탄이 되지 않기 위해.



작년, 서울대 졸업 축하 연설에서 방탄소년단의 아버지. 빅히트 방시혁 대표가 이런 말을 했다.




"저에게는 꿈 대신 분노가 있었습니다. 납득할 수 없는 현실, 저를 불행하게 하는 상황과 싸우고 화를 내고 분노하면서 여기까지 왔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저를 움직이개 한 원동력이었고, 제가 멈출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자신만의 행복을 정의하고 자신만의 행복을 이룩하는 인생을 살라는 그의 졸업 연설 중에서도 나는 이 말이 참 인상 깊었다. 우리는 선/악의 기준에서 악에 가까운 것들을 쉽게 터부시한다. 물론 선한 것들로만 가득한 세상이라면 얼마나 쉽겠냐만은 그렇지 않기에 어두운 곳에 있는 것들과 대면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자신의 분노를 마주하고 그것을 시도때도 없이 터져버리는 폭탄으로 치부하지 않는 것. 

분노를 신뢰하고 그 안에서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매일 벅차게 차오르는 감정의 파도 속에 좋은 서퍼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분노를 신뢰하기로 했다. 








비저너리의 크루 에세이 시즌 2부터는 비저너리 달력 뒤에 있는 그 달의 질문 중 하나를 골라한 주에 한 번, 월요일 아침, 크루들의 진솔한 답변으로 채워 나갑니다. :)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들도 바쁜 일상 속 생각에 잠기실 수 있도록 최근 한 달(4개)의 질문들을 공유합니다. 그리고 이번 한 주는 다음 질문 중 하나를 깊이 생각해보면서 어딘가에 답해 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요?



- 지난 크루 에세이 -


[시간]혀 가는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은 언제인가요?

[에세이 56] 소중한 시간의 영역을 넓혀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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