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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저너리 Dec 23. 2019

[에세이80] 미련 없이 떠나보내는 법

[정인의 크루에세이07] 한해를 무사히 보낸 내게 해주고싶은 말이 있다면


한 해가 참 길었다.


12월 달력 질문들을 읽으며 올해 내가 겪은 일들로 다큐 예고편 정도는 찍을 수 있겠다 싶었다.  

올해는 정말 이를 악 물고 버텨냈다. 존버 하겠다고 크루 에세이까지 쓴 마당에 무엇이 무서울쏘냐 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했지만 역시 사람은 겸손해야 하나보다.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들이 성큼성큼 다가와서 하루하루 어른이 되는 느낌으로 한 해를 보냈다.


그래서 한 해를 무사히 마무리하는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을 고르는 게 참 어려웠다.


'나 정말 잘했어!'라는 말에 야박한 내가 자신에게 한마디를 하려니 근거가 필요했다. 누가 봐도 내가 정말 장하다 싶은 일을 찾고 싶었고 그 이유를 찾으면 온갖 이유를 다 붙여서 나를 칭찬해야지 하는 마음에 신중하게 한 해의 사진을 돌려봤다. 그런데 한 해는 힘들었지만 순간순간의 나는 참 반짝이고 생기 있어 보여서 이질감이 들었다. 뭘 저렇게 세상 해맑게 웃는지, 너는 심각한 일이 없는 건지 잘 숨기는 건지 모르겠다던 지인들의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낯선 사람들과 조약돌로 글씨를 만들던 발리의 여름


그렇게 해맑고 행복한 내 모습들 속에서 올해의 순간들을 찾으려니 유독 발이 멈추는 사진들은 이제 사라진 것들, 다시는 만나거나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의 사진이었다. 소중했던 휴가, 1년 만에 해외에서 다시 만난 내 친구, 계속 계속 생각나는 이모, 그리고 왁자지껄하게 다 같이 찍은 할머니 생일 사진, 엄마랑 같이 마시던 와인. 이제 한동안 혹은 평생 다시 할 수 없는 것들이 올 해를 보내는 내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동시에 이 기억도 언젠가는 흐려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이상했다. 나를 칭찬하고 다독일 거리를 찾으려고 사진첩을 열었다가 겨울바람에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올 해에는 나에게 말고 그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서로 떨어져서 1년에 한 번을 겨우 보는 친구에게는 사실 나 올해 네가 너무 필요했다고,

이모한테는 미워해서 미안했다고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 한다고,

건강하게 웃고 있는 엄마한테는 우리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이미 했던 이야기들 혹은 하지 못하고 이제 할 수 없는 말들을 한 마디씩 정리하다 보니 사진첩 날짜는 12월이었고 정말 한 해가 가는 기분이었다. 이제 정말 "작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오른쪽부터 2018, 2019_머리띠가 두 개지요


그렇게 사진첩이 끝나갈 무렵 가장 최근에 찍은 사진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귀여운 크리스마스 머리띠 두 개

내가 담당하는 사업은 매년 연말 파트너사 직원들과 함께 시크릿 산타 행사를 한다. 그리고 그 행사에서 후원자를 구분하기 위해 어른들은 귀여운 크리스마스 머리띠를 하는데 이 귀여움이 일상생활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낯설 정도로 앙증맞다. (당신의 상사가 걸을 때마다 눈사람이 달랑거리는 머리띠를 하고 있는 그 낯선 모습을 상상해보라...)

작년 초 입사한 지 일주일이 갓 지나서 처음으로 참석하는 공식적인 행사 자리에서 받아온 그 머리띠를 자리에 고이 모셔두고 있고 있었는데, 지난 목요일 올해의 시크릿 산타 행사를 다녀오니 두 개로 늘어난 것이다. 그걸 보관하고 있던 나도 웃기고 또 한 해가 다 지나서 두 개가 모인 머리띠가 귀여워서 사진을 찍어두었던 게 다시 보니 (내 다사다난함에 한몫했던) 회사 생활의 산 증인들이었다. 사진 속 귀여운 머리띠를 보면 내가 눈물 쏙 빼면서 정리한 한 해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찌 보면 내 자리에서 그 긴 야근과 고뇌의 시간을 함께했으니 제일 친한 동료 같은 머리띠 사진으로 한 해 마음 정리는 마무리다. 참 길고 힘든 해였는데 마무리가 앙증맞다.






매년 시간이 지나는 속도는 빨라지는데 그만큼 무거워진다.

나는 미래를 고민하는 20대라고 생각했는데 다들 열병처럼 만난다는 서른이 얼마 남지 않았고, 다녀보면서 사회생활을 경험해볼까 라는 마음이었던 회사는 처음으로 1년 근속을 지나 이 다음에는 신규가 아닌 이직을 생각하는 본격적인 사회인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가 갈수록 지금까지는 겪지 않았던 것들. 내가 감당해내야 할 세계가 점점 넓어진다는 걸  온몸으로 배웠다. 앞으로의 삶은 더 큰 기쁨과 성취가 오는 만큼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나를 주저앉힐 거라고 알려주는 친절한 예고편 같은 해였다. 그래서 곁은 지나간 주연들에게, 비중 있는 신스틸러들에게 마음이 더 가는 해였나보다.

그리고 이렇게 내 주변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던 말을 한 마디씩 다 정리하고 나서야 내가 2019년에 나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올해 찍은 사진 중에 가장 기분이 좋아지는 사진



"그럼에도 잘 버텼다, 나라서 만들 수 있는 한 해였어." 


'열심히 버티고 참아내기'에서는 여한이 없는 한 해가 끝나간다. 이제 내년의 삶의 장르가 호러 일지, 스릴러 일지, 의외의 로맨틱 코미디나 다큐멘터리 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내가 올해 내게 건네는 말처럼 '나'라서 만들 수 있는 한 해이길 그리고 조금씩의 요행이 따르길 바래본다.

올해 철든 만큼 내년에는 철 없이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징그러웠던 2019년 안녕:)





한 해를 무사히 보낸 나에게 해주고 싶은 칭찬이나 위로, 덕담의 말이 있다면?





당신에게 2019년이란?

[에세이 79] 나의 2019년을 돌아보기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에세이 78] 올해 가장 기억 남는 순간은?


2019년의 마지막 달입니다. 올해 마무리는 어떻게 하고 싶나요?

[에세이 77 2019년의 마지막 달입니다]


지난 한 달, 스스로를 너무너무 칭찬해주고 싶은 사소한 일은 무엇인가요?

[에세이 76. 일상 속 길어 올리는 작은 성공들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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