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는 말하는 사람인가 행동하는 사람인가?
어슴푸레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나는 홀린 듯이 배낭에 짐을 대충 쑤셔 넣고 집을 나섰다. 의지할 것은 오직 지도 한 장뿐. 방향은 북동쪽이다. 서울시계를 벗어나자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적은 사라지고 더해지는 것은 짙은 어둠과 개 짖는 소리뿐.
다섯 시간이 지나자 발가락에 익숙한 통증이 찾아왔다. 분명 왼쪽 네 번째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이내 터졌을 것이다. 33년 전, 나는 군에 입대하고 행군을 하면서 그 발가락이 기형이라는 것을 알았다. 발가락 양말을 신어도 5시간이면 어김없이 물집이 터졌던 발가락이었다. 별빛 하나 없는 공동묘지를 지날 때와 로드-킬로 토막 난 짐승의 사체를 밟았을 때는 신기하게 통증이 잠시 사라지기도 했다.
각흘산과 광덕산 사이의 계곡을 넘으면 강원도 철원 땅이 시작된다. 내 여정도 곧 끝나리라는 기대가 있었을까? 새벽 2시, 지친 몸으로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자 힘이 빠지기는커녕 오히려 없던 힘이 불끈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정상을 넘어서자 해골 마크의 백골 3사단 표지가 나를 반긴다. 평지를 몇 시간 더 걸으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차를 운전하고 왔으면 2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였지만 걸어서 오자니 3박 4일이나 걸렸다.
토요일 아침 7시.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거지꼴로 다가오는 중년의 남자를 발견하고 초병(哨兵)이 경계태세를 갖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번쩍 쳐들고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듯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정문 넘어 연병장에는 시커먼 군인들이 아침 점호를 받기 위해 도열해 있었다. 그중에는 이등병인 내 아들도 있을 것이다.
“누, 누구, 아니, 어떻게 오셨습니까?”
초병은 사전 면회 신청도 없이 무작정 왔다는 말에 한숨을 쉬었고 서울에서 철원까지 걸어서 왔다는 말에 장탄식했다. 엄동설한에 걸어온 성의와 엄격한 면회 규정 사이에서 잠시 갈등하는 듯했다.
“중대장님께 보고하고 만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만나려고 온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아들에게 왔다 갔다고만 전해주세요.”
나는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아들이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을 때, 아비는 신용불량자로 전락해 있었다. 택시 운전으로 간신히 빚을 갚고 있다는 핑계로 평일에는 물론이거니와 주말에도 아들과 놀아주지 않았다. 책도 읽어주지 않았고 숙제도 도와주지 않았다. 아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었다. 당연히 부자지간에 추억도 없었다.
“다른 아빠들처럼 아침에 양복 입고 출근하면 안 돼?”
그리 거창하지도 않은 아들의 소원에 아비는 오히려 짜증을 냈다. 아들은 커가면서 내성적으로 변했고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 같았다. 자신감도 떨어져 보였다.
아들은 군대에 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입영 영장을 받고 나서는 스트레스가 한층 심해지는 것 같았다. 폭식으로 아들의 체중은 108Kg까지 불어났다. 결국, 또래보다 2, 3년 뒤늦게 입영했다. 여러 훈련 중에서 특히 행군이 힘들다고 했다. 아비는 남자라면 모두 견뎌내는 것이고 군대를 다녀오면 몸도 정신도 건강해질 것이라 했다. 말을 마치는 순간 아차 싶었다. 아들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공허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아버지는 아들과의 대화에 서툴다.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서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너무 쉽게 해 버린 것이다. 그에 대한 속죄와 반성으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아들을 응원하기 위해서 걸어왔다고는 초병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다.
첫 딸이 어린 나이에 하늘의 별이 되고 나서 아들은 2.5Kg으로 태어났다. 간신히 인큐베이터 신세를 모면했다. 교통사고로 고비를 넘기기도 했으며 백반증이 심해져서 부모의 속을 많이 태웠던 아이였다. 그럼에도 사랑을 듬뿍 주지 못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라고 했다. 아들의 부재-군입대-는 아버지를 뒤늦게 철들게 했다. 그동안 표현이 서툴러 가슴속에 간직만 했던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아비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부대에 화젯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선임들이 아들에게 면박을 주는 대신에 '각별한 아비의 사랑'을 부러워했다는 후문이다.
나는 현재, 무대에 올라가서 마이크를 잡고 말을 하는 강연가다.
무대 위에서는 번지르르한 말만 앞세우고
무대에서 내려와서는 다른 행동을 한다면 누가 내 말을 믿어주겠는가?
나의 삶이 여과 없이 강연 콘텐츠가 된다면 진정성 있는 강연가가 될 수 있다.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직업인 강연가가 그래서 나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