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우화라는 단어를 들으면 반사적으로 떠오른다.
여우와 두루미
어느 날, 여우와 두루미가 길에서 만났다.
"두루미야, 오랜만이네. 점심은 먹었니?"
"아니. 아직이야."
"그래? 잘됐다. 우리 집에 가서 같이 밥 먹자."
"좋아"
그렇게 기분 좋게 여우의 집에 초대된 두루미.
이내 여우는 맛있는 수프를 내온다.
"맛있게 먹어."
"고마워."
이 순간부터, 동상이몽이 생겨난다.
'납작한 접시에 음식을 주면 나더러 어쩌란 거지? 지금 나를 가지고 장난하는 건가.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었나? 그래도 그렇지. 먹는 걸로 장난을 하냐. 슬슬 화가 나려고 하네.'
'힘들게 요리를 해서 줬는데 왜 안 먹는 거지? 내 요리가 마음에 안 드나? 그래도 그렇지 차려준 정성은 생각도 안 하는 거야? 슬슬 화가 나려고 하네.'
"여우야. 미안한데.. 나 갑자기 컨디션이 안 좋아져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아."
"갑자기 왜? 많이 안 좋아?...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그리고 며칠 뒤 두루미의 집.
"지난번 초대해줘서 고마웠어. 답례로 내가 음식을 준비했으니 맛있게 먹어."
"고마워. 잘 먹을게."
두루미는 길고 좁은 호리병에 음식을 담아서 내어오고, 결국 여우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
'지난번에 네놈이 나를 골탕 먹였겠다. 너도 한번 당해봐라!'
'뭐지.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여기다 음식을 주면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얘 설마 지난번에.. 그래서?'
여기까지가 내가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읽은 내용의 전부다. 그때는 생각했다.
'권선징악. 인과응보. 뿌린 대로 거둔다. 여우가 잘못했네.. '
지금은 생각한다.
정말 여우가 잘못했나?
두루미에겐 잘못이 없는가?
두루미의 신체적 특성에 대한 배려 없이 납작한 접시에 음식을 내어준 여우는 정말 잘못했다.
그런데,
두루미는 접시가 납작해서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말을 왜 하지 않았는가.
'난 원래 내성적이야. 극소심형이라 그런 말 잘 못해'라고 이해해주기에는.. '그런데도 복수는 과감하게 잘하네..?!'라는 생각이 뒤따른다.
살다 보면 내게도 비슷한 상황들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분명 악의가 없는 선한 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악이다.
가령,
휴일에 힘든 아내를 위해 빨래를 해 주는 남편.
(실크와 면과 기능성의류를 한데 집어넣고)
'깨끗한 세탁을 위해서는 역시 삶는 게 좋겠지?'
결과는...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속이 안 좋았지만, 아내가 걱정할까 봐 별말 없이 점심을 조금만 먹은 남편. 그런 남편을 보며 '입맛이 없나' 싶어서 저녁상을 거하게 차려내는 아내.
"당신을 위해서 오늘은 신경 좀 썼어. 당신 좋아하는 걸로만 만들었으니 많이 먹어요."
결과는...
배려는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배려가 중요하지는 않다. 요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된 배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쓸데없는 오해로 배려가 독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고, 배려가 아닌 민폐가 되기도 한다.
사실 우리의 생각은 상대의 입장이 아니라, 나의 입장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중요한 것은 대화다.
부족한 배려든 무지이든 불필요한 오해는 언제라도 생겨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에겐 말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고, 또한 말을 할 수 있는 우리는 대화를 통해 생각과 마음을 나누어야 한다.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눈빛만으로 상대의 감정을 모두 알 수는 없다.
'나는 네가 아니기에, 그리고 너는 내가 아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