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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ka Sep 09. 2019

건강염려증의 기원(2)

그러나 신은 인간을 '완성된 채로' 창조하지 않았다

1편을 읽고 보면 더 재밌습니다 (아마도)


나는 왜 건강염려증으로 살게됐나
출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321245

수년 전 한참 대학생활을 할 때 인상깊게 읽었던 책이다. (전공과도 연관이 없고 아이를 낳을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닌 대학생이 어떤 연유로 이런 책을 집어들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당시에는 내가 허약하다는 생각도, 건강염려증 환자라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하던 때였다. 순전히 호기심으로 읽게 된 이 책이 건강염려증에 대해 고찰하던 중 불현듯 떠올랐다.


이 책에 따르면 아기는 자궁의 환경에 맞추어 프로그래밍되고, 세상 밖에 나와서도 자궁속에서 프로그래밍된 로직대로 살아간다.


엄마가 임신 초기에 영양 결핍 상태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른 시기에 비만이 나타났고, 엄마 뱃속에서 임신 후기에 기근을 경험한 사람들은 비만은 적었으나 심장질환과 당뇨병에 걸리는 확률이 높았다.
...
임신 중 미세먼지나 대기오염에 노출된 횟수가 많을 수록 아기의 출생체중은 적었고, 생후 6개월 때 천식이 발생할 확률 역시 월등히 증가했다는 통계적 연관성도 발견됐다.


즉, 자궁 안에서 아기가 겪은 환경이 아기의 건강상태, 더 나아가서는 성격에까지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예민함에 대하여

예민한 것은 건강염려증의 또 다른 큰 축이다. 외부자극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뜻이다. 예민함에 대하여 유전학자들은 '기질'이라 부르고 발달학자들은 그 위에 '환경적인 영향'을 추가하는데, 후성 유전학자들은 '자궁의 환경'을 얘기한다.


코르티솔은 스트레스가 예상되는 상황에 안정성과 균형을 유지하려면 꼭 필요한 호르몬이다. 그런데 엄마가 아이를 가졌을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코르티솔이 태반을 통해 아이에게까지 도달한다고 한다. 이 때 뱃속 아기는 높은 코르티솔 수치를 통해 '바깥세상은 굉장히 험난하구나, 까딱하면 목숨 보전이 어렵겠다'를 직감한다. 따라서 이 아기는 코르티솔을 많이 분비하여 외부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때로는 성격이 까탈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아래는 우리 엄마가 태반으로 코르티솔을 얼마나 보냈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 나는 대중교통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접촉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한다.

- 작은 소리(내 기준 큰소리)에도 놀라서 자각하기도 전에 엄청 크게 '엄마야' 혹은 '으아악' '으워어억'같은 비명을 지르는데 내가 지르는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더 놀랜다.

- 잘못 울린 화재경보에 심장박동수가 순식간에 치솟으면서 건물밖으로 뛰쳐나간 적도 있다. 계단을 뛰쳐내려갔더니 다리가 후들거려 죽는 줄 알았다.

- 폭죽소리와 비행체(여객선인지 헬기인지 UFO인지 모를 일이지만)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전쟁이 난 건 아닌지 테러가 난 건 아닌지 바로 포털을 열어 뉴스를 검색한다.

- 회의 중에 지진 여파로 울~렁~ 하고 건물이 흔들렸는데, 기겁을 하고 책상밑에 쭈그리고 들어갔다. 아무도 웃지 않았고 아무도 나무라지 않았고 아무도 회의를 중단하지 않았지만 회의가 끝나고는 놀림거리가 됐다.



자궁환경이 아이를 만든다니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위의 얘기들은 단순히 추측이라거나 가설이라거나 소설이 아니다. 자궁의 환경이 미치는 영향은 생물학적으로 메틸레이션methylation이라는 작용으로 이어진다. DNA의 G, A, T, C 중 C(Cytosine)에 메틸기(CH3 group)라는 분자가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서 스위치의 역할을 하는데, 이것이 메틸레이션이다.


DNA의 메틸레이션은 아니지만 분자구조가 이런식으로 변한다는 것을 설명하기위한 그림. 오른쪽 위 CH3가 바로 메틸기.

출처: https://www.researchgate.net/figure/Conversion-of-cytosine-to-5-methylcytosine-by-DNA-methyltran


예를 들어 기근이 심한 때에 자궁 속에충분한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한 아이는 지방을 분해하는데 관여하는 유전자에 메틸기 스위치가 꺼져있는 것이다. 적은 양을 먹더라도 지방을 많이 축적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 되는, 나름대로 현명한 메카니즘이다. 미래에 이 친구가 세상에 나오면 영양분을 섭취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잘 버티도록 준비시켜 주는것이다.


위의 코르티솔의 예에서는 스트레스 호르몬을 조절하는 유전자에 스위치가 꺼져있어서 스트레스가 가득한 상황에 항상 긴장하고 예민한 상태로 대기하여 목숨만은 부지하도록 태어나게 된다는 식이다.



문제는 내가 자궁 속에 있었던 상황과 현 상황이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나는 사실 1분 1초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외부 자극에 몹시 예민하게 반응해야하는, 언제나 생명의 위협이 발생할 수 있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지는 않다.


태아 프로그래밍 이론에 따르면 태아는 이것을 '네가 앞으로 나오게 될 환경에 대해 알아둬야 한다' 라는 신호로 인식하고 이에 적응해간다. 그러나 이런 예민함은 불안한 세계에서는 잘 적응한 셈이지만, 평화로운 세계에서는 불필요한 긴장을 낳는다.


자궁 속에서 프로그래밍 된 것 때문에 불필요한 긴장 가운데 살고있다니.


그러나 신은 인간을 판에 박힌 존재로 창조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의 유전자는 어느정도 판에 박혀있다.


인간이 갖고 있는 30억개의 유전자 중에 99.99프로는 다른 사람과 같고, 96프로는 침팬지와 비슷하다고 한다. 그러니 유전자가 1~2퍼센트라도 바뀐다는 말은 정말 모오오옵시도 다르게 생긴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그리고 그 하나가 바뀌는 데는 상상하기도 힘든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거의 불변에 가깝게 정의되어있는 특정 종의 유전자에 메틸레이션을 활용한다면?

상당히 빠르고 유연하게 신체를 조절할 수 있게 되는 거다.


실제로 유전자의 스위치를 켜고 끄는 메틸레이션은 평생 계속된다. 스무살이 넘어 성장을 마친 후에도 식습관과 운동, 스트레스 관리와 같은 환경이 유전자의 메틸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
똑같이 암 유전자를 갖고 있더라도 어떤 사람은 암에 걸리고 어떤 사람은 암에 걸리지 않는데, 이러한 현상은 환경이 암 억제 유전자의 메틸화에 영향을 미쳤느냐 안 미쳤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어쩔건가

내가 어떤 자궁환경에서 나왔는지, 그것이 어떻게 내 건강에 영향을 미쳤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최적의 환경이 아니었던 것은 확실할거다. 왜냐하면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처음 아이를 갖게 되는 초보 엄마는 보통 큰 스트레스를 받게 마련이고, 태교나 식단관리에 서투를 수 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지금 나의 건강염려증과 예민함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으니까.


막상 세상에 나와보니 자궁 속에 있을 때의 상황과는 좀 다르게 꽤 살만하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고 감사다. 그리고 생활습관과 꾸준한 관리로 잘못 프로그래밍 된 것들이 개선될 여지가 있다는 사실도. 그러니 제는 코르티솔 분비에 관여하는 메틸기를 좀 조절해봐야겠다. 굳이 이름 붙여보자면 무던해지는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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