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엄마랑 아빠가 뉴질랜드로 관광을 왔었다. 두 분은 딸들이 어찌 사는지 걱정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오신 듯했다. 우리 가족은 이전까지 함께 여행을 가본 기억이 없었는데, 그게 내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이다.
엄마, 아빠가 챙겨 온 짐을 보니 어마어마했다. 비행기에 화물로 실을 수 있는 무게는 한 명 당 20킬로였지만 당시에는 승무원 재량으로 5킬로 정도까지는 오버 차지를 안 받고 그냥 넘어갔으니, 두 분이 50킬로나 되는 짐을 싣고 오셨다. 거기다 기내에 반입할 수 있는 가방까지(그때는 무게를 재지 않았다) 어깨에 메고, 두 손에 들고 오셨다.
엄마는 그날 밤늦은 시간까지 짐을 펼쳐 보이며 일일이 설명해주셨다. 당시 더니든에는 한인마트가 없고 중국 마트에 간간히 한국 라면이나 조미료 등을 팔긴 했는데, 웬만해서는 한국에서 직접 조달해서 쓸 수밖에 없었기에 각종 양념들, 우리가 좋아하는 식재료, 심지어 직접 볶아온 멸치볶음과 김치, 소고기고추장까지 랩으로 칭칭 감아 바리바리 싸들고 오셨다. 25킬로짜리 트렁크 하나가 모두 먹을 것들이었다.
다른 짐가방 안에는 우리가 입을 새 옷들(한창 클 때라서. 물론 기대만큼 크진 않았지만)과 아토피가 심했던 내가 바를 화장품과 약들, 지오디/샵/임창정의 새 앨범들 등 내가 엄마에게 사달라고 했던 것들이 들어있었다. 엄마가 메고 온 백팩에는 내가 읽을 책이 잔뜩 들어있었다. 책이 무게가 많이 나가니 짐가방에 넣으면 금방 무게가 차서 무게를 안재는 백팩에 넣고 직접 메고 오셨다고 했다. 공항 검색대에서 안 걸리려고 안 무거운 척 휙휙 들었다 놨다 했다던 에피소드까지 함께.궁금해서 백팩의 무게를 재봤더니 21kg...
“그럼 아빠 가방엔 내 거야?!”
동생이 기대하는 말투로 아빠가 메고 온 백팩 쪽으로 손을 뻗자 엄마 아빠는 동시에 안된다고 빽 소리를 지르셨다. 하지만 이미 가방은 투두둑 열려버렸고, 그 안에서는 투명한 플라스틱 소주병이 와르르 쏟아졌다. 아빠는 말없이 소주병을 주섬주섬 주워 담았고, 엄마는 아빠를 흘겨보며 “그러게 그걸 그렇게 들쳐 메고 왔어야 했냐”라고 한마디 했다. 거기에 애들 먹을 거라도 더 넣어 왔으면 좀 좋았겠냐고.
화가 날 법도 한 게, 자신은 아이의 책을 어깨에 지고 오는 마당에, 아빠란 사람이 그렇게까지 술을 챙겨야 했을까 싶었을 거다. 그 시절에야 기내에 액체류 반입 제한도 없었고, 공항 검색대 자체가 그리 타이트하지 않았으니 다행이지만, 요즘 같았으면 화염병 테러리스트로 잡혀갈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다음날부터 우리는 가이드를 만나 더니든 주변과 크라이스트처치까지 여행을 했다. 자영업자가 다 그렇듯 엄마도 학원을 하며 한 번도 휴가를 내본 적이 없었고, 아빠는 원래 어디를 돌아다니는 걸 싫어해서 우리에게는 첫 여행이었기에 나랑 동생은 차만 타도 마냥 신났었다.
아빠는 한국인 가이드 분과 마른 육포, 홍합 스튜 등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안주거리와 함께 밤마다 소주를 드셨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 정신이 혼미한 채로 관광을 다니셨고 나는 그 모습이 그렇게도 창피할 수가 없었다. 여쭤본 적은 없지만 아마 아빠도 뉴질랜드 관광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으실 것 같다.
적당히 즐길 정도의 술도 아니고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마셔야 하는 게 술이라면 나는 절대 마시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설령 마시더라도 다음날 정신 못 차리는 모습은 그 누구에게도 절대 보이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인데도 그놈의 술을 놓을 수 없어서, 아빠는 일주일의 일정 동안 잔스포츠 백팩이 터질 듯 담겨있던 소주를 모두 마시고 가방을 책가방으로 쓰라고 주시며 두 어깨가 가볍게 귀국하셨다. 나에겐 그렇게도 미워 보일 수가 없었던 그 잔스포츠 백팩. 그때부터 아빠는 술이 문제라는 걸 알아챘어야 하는 건데. 덕분에 내 처음이자 마지막 뉴질랜드 관광도 아빠의 술과 취한 모습 말고는 기억이 나는 게 없다. 아, 비가 온 탓에 번지점프를 못 해서 엉엉 울었던 것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