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한국사람은 믿으면 안 돼 1

사실 그 누구도 믿어선 안돼

by 새록

처음 뉴질랜드에서의 두 달은 꿈만 같았다. 그러다 학생비자를 발급받고 정식으로 ‘유학생’이 되었을 때는 이야기가 좀 달랐다. 학업이 힘들었냐고? No. 하교하자마자 가방을 던지고 줄곧 놀아도 학교에서는 웬만해선 탑이었다. 한국에서 선행으로 공부해놓은 수학, 과학 덕분에 유학 생활 내내 크게 공부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영어로 바꿔서 생각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나랑 동생이 학생비자를 받자마자, 사장님 부부는 우리가 ‘잡은 고기’라고 생각이 되었는지 그때부터는 모든 게 달라졌다. 욕실에 놓여있던 팬틴 샴푸가 달러 스토어에서 팔던 1달러짜리 샴푸로 바뀐 것쯤은 그런가 보다 했다.


우리의 저녁식사 시간은 여섯 시. 그들의 저녁식사 시간은 일곱 시. 철저하게 구분된 시간과 철저하게 구분된 메뉴가 존재했다. 7시가 되면 사장님 가족 네 식구만의 만찬이 시작됐고 나랑 동생은 부엌 뒤편에 있는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삼겹살 냄새, 전골 냄새, 바비큐 냄새를 맡았다. 그들은 우리 엄마가 준 돈으로 매일을 그렇게 즐겼다.


누텔라라고 하는 초콜릿 잼은 사장님 부부의 딸들만 먹을 수 있는 거라 팬트리 속에 숨겨져 있었는데, 하루는 내가 그걸 몰래 먹었다. 숟가락으로 허겁지겁 푹푹 퍼먹었다. 그 모습을 본 사장님 댁 큰언니는 나에게 쌍욕을 퍼부었는데, 왜 흥부가 놀부 아내에게 반대쪽 뺨도 때려달라고 하는지 이해가 됐던 순간이다. 욕을 먹던 순간에도, 뺏기기 직전까지도 한 숟갈이라도 더 먹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멀리서 달큰한 초콜릿 냄새를 맡기만 하다가 직접 맛을 보니 그저 황홀함 그 자체였다.


항상 먹는 게 고팠던 나는 엄마가 주고 간 비상금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줌마가 필요한 건 다 사주실 거라고 했는데, 삼겹살도, 누텔라도 아무것도 사주지 않으니까 나에게는 비상사태가 분명했다. 주말이면 도서관에 간다는 핑계로 동생이랑 시내로 나가 먹고 싶은걸 다 사 먹고 몰래 사들고 들어왔다. 들키면 언니들한테 뺏기기 때문에 이불 속에 들어가서 몰래 과자, 젤리 등을 먹고 쓰레기는 모아두었다가 학교에서 버렸다.


돈은 금방 바닥이 났고, 엄마에게 더 보내달라고 전화를 했더니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썼냐고 꾸중을 하면서도 엄마는 더 보내줬다. 한번, 두 번, 또, 또, 또 보내달라고 전화를 했다. 그쯤 되니 엄마는 돈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아냐고, 전화기 너머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만큼은 한 없이 친절했던 아줌마의 말에 따르면 우리 엄마는 자신에게 아이를 맡긴 죄인이었으니까.


영화에서 학대를 당하면서도 신고를 못하는 주인공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를 할 수 있게 됐다. 온 세상은 인자한 교회 장로님이자 떳떳이 돈 잘 버는 사장님 부부를 손가락질 하지 않았고, 우리 엄마조차 그 가면에 속았다.


그 시절, 먹지 못해서 생기는 심리적 결핍은 나를 폭식으로 이끌었다. 먹고 싶은 음식은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먹어놔야 했으니까. 원래도 식욕이 왕성하고 뭐든 잘 먹는 아이가 한창 클 나이에 음식 설움이 크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이따금씩 어린이날이나 생일 때 엄마가 상자 가득 우리가 좋아하는 한국 과자를 담아서 소포로 보내주었는데, 공항 검열은 통과해도 언니들의 검열은 통과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도 오징어 땅콩이 싫다. 언니들이 싫어하는 오징어 땅콩만 남겨놔서 나는 그것만 먹어야 했으니까.

집에서는 부실하게 먹고 나가서 잔뜩 먹었다.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으니 매일 몸에 안 좋고 맛있는 것만 잔뜩 먹었다. 뉴질랜드에서 유명한 캐드버리 초콜릿, 특히 초콜릿이 얇게 겹겹이 쌓여있어 식감이 독특하고 아이스크림에 꽂아서 팔던 Flake라는 초콜릿과, 달고나에 초콜릿을 입힌 Crunchie라는 초콜릿을 떨어지지 않게 샀었다. 그리고 Licorice(리코리쉬)라고 하던 빨간 젤리 비슷한 먹거리가 있었는데, 그걸 정말 많이 먹었다.


그 외에도 짜고 기름진 살라미와 마트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던 젤리를 소개 안 할 수가 없다. 요즘은 한국에도 그런 젤리 가게가 있는데, 뉴질랜드에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 영화에서나 볼 법한 젤리 코너가 마트에 크게 자리해 있었다. 한쪽 벽을 바닥부터 천장까지 가득 젤리와 초콜릿으로 채워놓고 대, 중, 소 크기의 종이로 된 콜라컵을 계산한 뒤 담을 수 있는 만큼 담아가면 됐었다. 꾹꾹 눌러 담아 뚜껑이 닫히도록 하면 되는데, 나는 매주 주말마다 가서 제일 큰 크기의 컵을 채워서 집에 가져갔다.


이렇게 몸에 안 좋은 것만 먹어대니 아이러니하게도 살이 쪘다. 가끔씩 한국으로 부치던 사진 속에 뒤룩뒤룩 살쪄가는 나를 보며 엄마는 오히려 내가 잘 먹고 잘 산다고 생각했다. 정말 어리긴 했는지, 12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로서는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은 못했다. 시내에 있던 중식당, 일식당의 문턱이 왜 그리 높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먹는 스트레스 빼고는 크게 못 견딜만한 것은 없었다. 일 년 내내 세탁되지 않는 이불을 덮고 자도 괜찮았고, 한국에서 보내오는 문구류, 옷, 화장품 등 모든 물건을 검열받고 내주어야 해도 괜찮았고, 스스로 청소를 하지 않으면 청소되지 않는 방에 살아도 괜찮았다. 그때는 원래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고, 다 괜찮았다.


어느 날 엄마는 우리가 호주로 옮기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고, 그때의 명분은 더 좋은 교육환경이었다. 아마도 시골에서의 한계를 보았던 것 같고 마침 엄마의 지인인 선교사님이 주선 가능했던 집이 있었기에 추진이 됐던 것 같다. 물론 나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호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나서 엄마가 아줌마에게 연락을 취하니 그때부터 그들은 대놓고 모든 것을 트집 잡아 돈을 뜯어내려고 했다.


떠나기 직전에도 동생이 연필깎이를 떨어트려 손바닥만큼 오염된 카펫 때문에 방 전체 카펫을 갈아야 한다며 말도 안 되는 큰돈을 요구했다. 그들이 내어주지 않는 비행기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송금해야 했던 엄마는 우리가 떠나는 때가 되어서야 그 집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남의 자식들이라고 우리를 차별하고, 어떤 미친*이 자기 자식들을 떼놓고 사냐고 상처 주는 말을 하던 당신. 당신이 아무리 딸들을 끼고 살았어도 당신이 말하는 그 미친*보다 당신의 자식을 잘 알았던가요? 당신은 당신 집 창문으로 17살 딸 방에 낮이고 밤이고 남자가 드나드는 사실도 모르셨어요. 나중에는 자신의 방에서 어떤 남자에게 맞기도 하던데, 모르셨죠? 가게 일로 늦는 날이나, 교회에서 모임이 있는 날 밤이면 그 방에서 남녀가 섞여 술을 진탕 마시고 무슨 일을 벌였는지도 모르셨고요. 저는 다 들었답니다.


God bless you, really. You need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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