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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포삿포삿포포삿포한 소설을 추천합니다

89_너무 한낮의 연애

by 이기자

이름만 적어내면 되는 시험이 있었다. 시위가 한창일 때, 시국이 어수선할 때, 교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시험장에 들어와서 한 시간 동안 앉아 있다 가라고.

문제는 없으니 시험지에 이름만 적으면 된다고.

그러면 된다고 말했다.


모두들 시험지에 이름을 적고 한 시간을 기다렸다.

조중균씨는 손을 들고 교수에게 물었다.

"왜 문제가 없는 겁니까?"

"이름 적기가 시험이야, 이름만 적으면 돼."


조중균씨는 이름을 적지 않았다. 대신 빈 종이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지나간 세계라는 시를 썼다.

그가 쓴 시가 어떤 것인지 작가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가 무엇인지 당연히 알고 있다. 조중균씨가 빈 종이에 써 내려간 시는 우리 모두가 썼어야 답이다. 우리는 모두 답을 알고 있다. 당연히 알고 있다.

알면서도 쓰지 않은 것뿐이다. 문제가 없다는 핑계를 대며, 이름만 적고 나가면 된다고 스스로를 이해시키며, 그렇게 쓰지 않은 것뿐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쓰지 않고 이름만 적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얻어지는 형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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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의 단편집 <너무 한낮의 연애>에 실린 단편 '조중균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조중균의 세계는 최근에 읽은 한국어로 쓰인 단편소설 중 가장 인상적이었다. 단편집에 실린 이야기들은 결코 가볍지 않은데 읽는 내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포삿포삿포포삿포.


이런 의성어라니. 김금희의 소설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인데 이미 구름 위를 걷는 것만 같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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