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세집에 이사를 오면서 들고 온 가구는 5단 플라스틱 서랍장 외에는 없었다. 이사 온 집에는 붙박이 식탁이 있었고 비어진 3칸짜리 옷장이 있었다. 우리 가족의 첫 식사는 작은 밥상을 펼쳐두고 둘러앉은 것으로 충분했다.
살아보니 이런저런 새로운 필요들이 생겨났다.
아들들이 몇 번 올라간 후 식탁 겸 아이들 놀이 책상이었던 밥상 다리는 내려앉았고 붙박이 식탁을 쓰자니 당장 의자가 필요했다.
중고마켓에서 6000원에 구해온 가벼운 스툴에 다들 엉덩이 무게를 싣고 식탁에 둘러앉으니 확실히 밥상보다 넓고 움직임도 편했다. 그렇게 스툴이 추가되었다.
초1이 된 첫째가 붙박이 식탁 위에서나 바닥에 앉아 만들기며 책 읽기며 이어가다가 여름방학 건강검진에서 시력에 주의를 요한다는 소견을 듣고 당장 책상을 하나 들이자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미니멀라이프는 필요가 생겨도 바로 '그린라이트'를 켜지 않는 기다림을 가르쳐준다. 진짜 필요와 필요라는 가면을 쓴 소비 충동을 구별하는 데 있어 기다림의 시간은 참 도움이 많이 된다. 어떤 물건이 필요하다 싶을 때 며칠정도 여유를 두고 그 물건 없이 지내본다. 이전과의 큰 차이는 이제 그 물건이 없어서 나와 우리의 생활이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 의도적으로 인식하면서 필요의 진정성을 따져보는 거다. 그렇게 며칠정도 시간을 보낸 후에도 그 물건이 필요하다면 이제 우리 집안에 그 물건을 들일 준비를 천천히 시작한다.
특히 큰 가구일수록 한번 들이면 유지 관리에 시간과 공간과 수고가 많이 든다. 신중해야 할 이유이다.
집안의 어느 공간에 둘지, 한번 들이면 변화에 따라 이동은 용이할지, 아이들이 자라는 성장 속도에 따라 이 물건도 그 유용성에 충분히 변주가 가능할지. 즉 가급적 오랫동안 물건의 효용가치에 맞게 잘 사용할 수 있을지를 따져본다. 그리고 잊지 말고 꼭 우리 집과 조화롭게 어울리지를 물어야 한다. 벽지와 바닥과 전체적인 집안의 색감, 다른 물건들과 잘 맞을지를 고민하는 시간까지 통과한다. 그 과정에서 아직 물건을 들이지는 않았지만 우리 집 한 공간을 그 물건에게 내어 줄 마음의 준비를 마치게 된다.
마음의 준비는 마무리했고 이제 필요와 아름다움까지 두루 갖춘 물건을 본격적으로 찾아볼 때이다.
중고마켓을 며칠 동안 들락날락하며 적절한 책상이 있는지 부지런히 살폈다. 책상이라는 필요에는 맞지만 우리 집의 전체적인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물건들 사이에서 조금씩 피곤이 쌓여가고 점차 어차피 중고 가구인데 대충 가격대만 맞으면 구매하자는 타협심리가 스물스물 올라오기 시작했다.
쓰면 쓸수록 만족스러운 물건과 함께 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 지점을 늘 조심해야 한다.
우리 두뇌는 원래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한다. 그래서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금세 피곤해진다. 그때 그 피곤을 이겨낼 수 있는 분명한 기준이 없다면 쉽게 타협하게 되고 그렇게 들인 물건은 들인 돈과 시간에 비해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들이 많다. 그러다 보면 또 언제 이 물건을 내놓을지 적절한 명분을 찾게 되는 자신을 보게 된다.
책상을 고르는 나의 기준은 분명했다. 책상이라는 필요와 더불어 흰 벽에 내추럴한 우드톤 분위기의 전체 집 컬러와 맞아야 했다.
어느 날. 아파트 재활용장에 나온 원목 식탁. 보자마자 '앗! 아이들 책상으로 쓰면 되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재활용장에 나온 '쓰레기'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사실 너무 깨끗하고 상태가 좋아서 내가 돈을 내고 구매한 것도 아니면서 아깝다는 말을 연신했다. 얼룩이 전혀 없는 흰색 상판에 탄탄하고 안정적인 원목 식탁 다리. 적절한 높이와 상판 너비까지. 남편과 나는 식탁을 같이 들고 집으로 향하며 새 손님을 맞듯 설레고 신나 했다. 역시 집에 들여놓으니 더욱 안성맞춤으로 냉큼 제자리를 찾고 우리 집의 한 풍경으로 자리한 식탁 겸 책상.
따로 가구가 없는 거실에 새로 들인 아이들 책상은 그렇게 우리 집의 공기를 사뭇 새롭게 만들고 따뜻하게 정돈해 주었다. 옹기종기 아이들이 어깨를 맞대고 책상 위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종이접기를 하는 풍경은 물건이 빚어내는 하나의 사진 같기도 하다.
기준이 분명했기에 기다릴 수 있었다. 타협하지 않고 기다린 만큼 만족스러운 물건을 만났다. 이렇게 필요와 아름다움은 분명 공존할 수 있고 그럴 때 내가 만들어가고 있는 미니멀라이프는 한층 단정하고 간결하면서도 빛이 반짝거릴 것이다.
문득, 몇 달 전 여기저기 월셋집을 보러 다니던 때 한 부동산 소장님의 말이 떠오른다.
그 부동산 소장님의 안내로 보고 온 아파트 1층. 모든 창문에 암막커튼을 쳐두어서 한낮에도 굴 속같이 어두웠던 집. 하지만 구조나 넓이나 집의 위치가 마음에 들어서 고민을 이어가던 중, 소장님께
"소장님, 다른 건 마음에 드는데 1층이라서 어둡지 않을까, 고민이 되네요." 했더니
" 어차피 잠깐 살고 나갈 월셋집 찾으면서 그렇게 이것저것 따지면 집 못 구해요."
라는 답이 돌아왔다.
소장님 입장에서야 얼른 매매거래 하나를 성사시키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 테지만,
아니다. 그렇게 타협해서는 안된다. 조금 더 발품을 팔고 손품을 들이더라도
우리는 우리 일상의 필요와 아름다움을 공존시킬 수 있는 선택을 늘 의지적으로 내려야 한다.
분명 큰돈을 들이지 않아도 조금만 더 마음을 내고 세심히 돌아보면 아름답고 우아하면서도 그 기능을 충실히 하기에 우리의 삶을 더 윤택하게 해주는 공간과 물건은 늘 존재한다. 그것을 찾아내는 감각을 키우는 일. 좀 수고롭더라도 충분히 가치 있는 투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