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성장애 환자의 고군분투 직업 탐방기 1탄
감사하게도 나는 부모님이라는 온실, 그 속의 잡초처럼 자랐다. 화초라고 하기엔 자유로운 방목이 곁들여진 양육환경이었기에, ‘온실 속 잡초’라고 명명하고 싶다. 20대 중반까지 부모님의 집에 기거하며, 등록금은 부모님께서 내주셨고, 거기다가 용돈까지 손 벌리던,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철없지만 행복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대학 졸업 이전의 사회생활을 살펴보자면, 잠깐의 단기 아르바이트를 두어 번 정도 경험하였으나 현재 기억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여, 아르바이트에 대해서는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대학 졸업 이후 입사한 병원이 나의 공식적인 첫 직장이자, 사회생활로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30대 중반 현재의 나는, 약국에서 여러 가지 보조 업무를 하는 아르바이트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곳에 오기까지 무려 8개의 사직서를 제출한 경험이 있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3년 4개월가량 일터에 몸담으며 겪었던 일들을 기록해 보려고 한다.
1. 종합병원 병동 간호사
작지 않은 규모의 종합 병원, 그중에서도 내과계 병동의 간호사로 나의 첫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내과계 병동이기에 환자의 중증도가 높아 업무 강도는 매우 고되었으며, 실수는 절대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의료계의 특수성으로 숨 막히는 시절을 보냈다.
이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VIP 병동으로의 부서 이동을 경험하였으나, 적응에 실패하고 결국 사직서를 제출하게 된다.
하지만 좋지 않은 기억만으로 가득한 것은 아니다. 발령 당시, 나라에서 시행하는 사업으로 인하여 한 부서에 11명의 동기들과 함께 발령을 받게 되었다. ‘동기사랑 나라사랑’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함께 어우러져 울고 웃으며 보낸 시간들 덕분에, 하루 또 하루 버텨가며 1년 7개월이라는 시간을 채우고 퇴사를 하게 되었다.
거의 1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이 병원에 남아 있는 동기는 3명뿐이나 여전히 단체 메신저는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서로의 경조사를 살뜰히 챙기는 소중한 동기들로 남아있는 것은 후일담이다.
2. 건강검진센터 내시경실 간호사
첫 직장을 그만둔 후, 친구와 말레이시아 여행을 다녀오고, 퇴직금으로 치아 교정 비용을 일시불로 시원하게 긁었으며, 베짱이처럼 탱자 탱자 놀던 26살의 겨울이었다. 불현듯 주변의 개미 친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불안한 마음이 올라올 때쯤, 건강검진센터 간호사 구인 공고문을 발견하였다.
지원하였고, 면접을 보았으며, 출근 첫날, 물 한 모금 마실 새 없는 근무 환경에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퇴근 후 이유 모를 눈물을 흘리며 고민하다가, 다음날 출근하여 사직서를 작성하게 된다.
3. 기업 출장 검진 간호사
두 번째 직장을 하루 만에 그만둔 나는, 나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기 싫었다. 곧바로 다음 계단을 밟기 위해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던 중에, “여기 한 번 와보는 것 어때?”라며 본인이 근무 중인 곳을 제안하는 친구의 말을 따라 출장 버스에 오르게 된다.
지방 어느 도시에 위치한 기업에 근무 중인 직원들의 건강 검진을 진행하는 간호사 역할이었다. 매우 바쁘게 돌아가는 업무였으나, 혈압을 측정하거나 수검자들이 작성한 검진 체크리스트를 확인하는 등의 단순노동이었기에,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그러나 월요일 새벽에 버스를 타고 지방에 내려가 5일간 숙소에서 지내고, 금요일에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일정이 약간 지겨워질 때 즈음, 본가 근처 한방병원에서 근무 중이시던 지인 간호사 선생님께서, “여기 한 번 와보는 것 어때?”라고 제안하셨다.
그렇게 출장 버스 여행은 3주 천하로 막을 내렸다.
- 2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