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세정 Jun 28. 2022

지나친 자유는 독이 된다.

사람 사는 이야기

학교 가기 싫어

어린 시절 할머니 손에 자랐던 나는, 다른 아이들이 누리지 못할 자유를 누렸다.

"할머니, 학교 가기 싫어."

"가지 마."

할머니는 여자는 고등학교만 나와도 된다고 하셨던 분이다. 아이가 학교 가기 싫다는 데 왜 굳이 보내냐는 입장이셨다. 는 학교 가기 싫은 날은 할머니를 졸랐다.

"할머니 나 아프다고 해줘."

딱히 집에 뭘 할 게 있었던 것도 아니라, 며칠 놀다가 심심하면 학교를 갔다. 지금은 결석계와 진료 확인서를 내야 하는데, 당시에는 그런 게 없었다. - 적어도 난 결석했다고 어떤 서류를 내 본 적이 없다.

흠, 당시에도 그런 게 없을 리는 없고 그냥 내가 쿨하게 학교를 안 갔나 보다.


한 번은 TV 가요 프로그램을 보다 따라서 춤을 추고 있는데, 반 아이가 찾아왔다. 계속 결석을 하니 걱정이 된 담임 선생님이 같은 동네 사는 아이에게 찾아가 보라고 부탁을 했다. 내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빼꼼히 문틈으로 내미는데, 춤추다가 어찌나 민망했던지, 장면은 스틸컷처럼 기억에 남아있다.


- 중에 교육행정 파트를 공부하다 알게 된 사실, 저 정도로 결석을 많이 하면, 졸업 인정이 안될 수도 있었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50조제2항에 에 따르면 수업일수의 2/3은 채워야 한다.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고!


내가 이리 커서 그런 건지, 나는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하다 소리를 듣는다. 가능하면 아이가 하자는 대로 하는 편이다. 어차피 반대한다 해도 안들을 거 아닌가? 다만, 부모 된 도리로 말은 해주자.

"엄마 생각에는 말이야. 이런 것 같은데 넌 어때?"

"응, 엄마, 엄마 말이 맞는 것 같아." 내지는 "엄마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엄마 친구 아들은 이런 말을 하려나?

우리 아이들은 "나도 다 안다고."고 말한다.

실랑이 끝에 나도 한마디 덧붙인다.

"선택을 할 때는 그 책임도 네가 진다고 생각해야 해." 

"나중에 엄마 탓하지 말고."

엄마도 방어막 치는 셈이다.


며칠 사이로 아이들이 나란히 사고를 고 있는 아이들, 이 무시키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냐? 나는 너희들을 믿었는데, 너무 믿은 거냐? 타이트하게 관리해주랴?


(나) "너희들 고모처럼 해줘? 거실에 CCTV 달까?"

(첫째) "흠, 고모 정도면 부모로 괜찮지."

(둘째) "엄마가 날 좀 더 관리해줬더라면 내가 더 잘되지 않았을까?"

(나) "뭐라고? 나 진짜 관리한다?"

(둘째) "이미 늦었어. 우린 이미 이렇게 컸다고. 지금 해봤자야."

*이 날 있었던 대화 아닙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스스로 결정하게 한다면?

아이들이 너무 어린 나이 스스로 결정하게 되면, 더 잘 우울해하고, 적응에도 문제를 보 수 있다고 한다.

자유는 좋은 거 아니었어? 왜 우울해진다는 거지? 게다가 자아존중감도 낮아질 수 있다데?


그릿(Grit)에서도 효과적인 양육을 '권위인 양육방식'으로 꼽았다. 권위적인 양육방식은 높은 기대를 설정하고 아낌없이 지지해주는 방식을 말한다. 앤젤라 더크워스는 '권위적인'이라는 말에 오해가 있을까 싶어 '현명한 양육방식'이라고 바꾸어 불렀다. '지지'를 해주는 것으로도 아이는 훌륭하게 잘 크겠지만, 아이에게 높은 '기대'를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

https://brunch.co.kr/@viva-la-vida/274

권위적인 부모는, 아이가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적절히 개입한다. 아이가 자라면서 그 개입 수준은 낮아진다.


중요한 의사결정은 아이에게 맡겨야 하는 거 아니야? 부모 뜻대로 하면 아이가 자기 힘을 발휘할 기회를 잃는 것은 아닐까?

대답은, "아니요."


어떤 문제에 어느 정도 수준으로 개입할 것인가?

아이가 몇 살인가?

맥락과 정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부모는 아이에게 테두리를 설정해줘야 한다. 아이는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다. 저 사람은 어떤 의도로 이렇게 행동하는지,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처신하는 게 좋을지, 모르는 것투성이다.

게다가 유혹하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스로 결정하라고 내몰리게 된다면, 손쉬운 유혹에 빠지기 쉽고 그 결과 자아존중감이 낮아지는 게 아닌가 생각해봤다.(논문에 있는 내용 아님)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혼란 속에서 스스로 결정하라는 말은, 불안한 아이들을 더 불안하게 한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맬 때 부모는 세상을 먼저 살아본 사람으로, 적어도 이럴 때는 대게 이렇게 되더라. 예측되는 결과값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잘 키우고 있는 걸까?


아이들에게 자율성을 키워주려고,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준다고 여겼는데, 사실은 내 몸이 피곤해서 아이들 하자는 대로 놔둔 거 아닌가?

지지고 볶더라도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을 좀 더 강하게 말할 필요가 있진 않았을까?


결국 자기가 직접 겪은 것만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실수도 해보고 헤매기도 하면서, 배워나가길 바랬는데, 그 경계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한 게 아닌가 걱정이다.

루소 말대로 '자연 벌'로 배우는 건 결국 비효율적인 방법이었을까? 전히 결론이 나지 않는다. 둘째 말 따나, 이제 와서 타이트하게 관리를 하긴 늦은 것 같다.


참고 : Judith G. Smetana, Nicole Campione-Barr and Christopher Daddis, Longitudinal Development of Family Decision Making: Defining Healthy Behavioral Autonomy for Middle-Class African American Adolescents, Child Development Vol. 75, No. 5 (Sep. - Oct., 2004), pp. 1418-1434 (17 pages)


Decision making was described as youth supported (where adolescents make decisions after seeking parental advice) rather than youth alone (where adolescents make decisions without parental involvement). The longitudinal finding that greater autonomy over personal issue in early adolescence was associated with more depression in late adolescence is consistent with previous research, which has constantly indicated that too much youth-alone decision making has negative effects on adjustment.  <출처 : 위 논문, p.1429>


<출처 : Pixabay>
한줄 요약 : 자유에는 바운더리가 필요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칭찬은 구체적으로 하기, 위로는 공감하고 편들어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