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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Jun 10. 2024

내 몸이 이상해

불능과 가능성 사이의 몸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날은 햇볕이 따사롭다 못해 따갑게 피부를 내려쬐는 한 여름날이었다. 우리 초등학교 야외 운동장 왼쪽 구석에는 가로로 길게 대여섯 개 수도꼭지가 있는 개수대가 있었는데 피구 시합을 막 마친 우리 반 여자 아이들은 시원한 물을 찾아 앞으로 삼삼오오 몰려들고 있었다. 마침 월경 중이던 나는 아프다는 핑계로 피구를 지켜보기만 했지만 나의 티셔츠 아래에도 땀이 축축하게 나있었다. 초경과 함께 가슴이 봉긋하게 나오기 시작했기에 한 여름에도 티셔츠 위에 난방을 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미 ‘부라자’를 입기 시작한 친구들도 더럿 있었지만 나는 어쩐지 그게 더 부끄러웠다. 시원한 물로 팔이라도 씻으면 더위가 좀 가시리라 하며 수도꼭지를 튼 순간, 오른에서 물이 튀어왔다.


     “어, 미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웃통을 벗어던지고 물장난을 치는 남자아이들이 있었다. 여자아이들이 운동장 구석에서 하얀색 선으로 네모를 만들어 피구를 하는 동안 남자아이들은 운동장 전체를 누비며 축구를 하곤 했다. 그리고 늘 축구가 끝나면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된  우르르 몰려와 개수대로 전진을 하곤 했다. 난방 소매 물에 흠뻑 젖었지만 벗을 수 없었다. 사과를 하며 멀어져 가는 사내아이들 쳐다보며 내가 이제는 여자가 되었구나 생각했다. 그것은 한계를 그리고 할 수 없음을, 말하자면 ‘불능’을 깨닫는 일이었다.




그 후로 이십 년이 흘렀고 그동안은 내 몸을 스스로가 (대체로) 제어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았다. 물론 그동안 월경은 잊지 않고 매달 찾아와 내가 여자라는 것을 잊지 않게 상기시켜 주었지만, 괜찮았다. 한 달 중 대여섯 일을 참고 견디면 나는 다시 ‘인간’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 웃통을 벗고 운동장을 누빌 수는 없어도 남자애들과 같은 교육을 받았다. 인턴십을 하거나 교환학생을 지원할 때도 여자라서 못하거나 더 어려운 일은 없었다. 그러나 임신은 내가 여자라는 것을 처절하고 격렬하게 다시 인식하게 되는 사건이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점점 커져가는 가슴과 둥글게 변하는 몸도 낯설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입덧이었다. 아기집을 확인한 지 얼마 안 되어 시작된 입덧은 내 몸을 한층 더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숙취가 느껴졌고 밥 짓는 냄새가 너무 역겨워서 한동안 밥솥을 멀리해야 했다. 이 중 가장 심했던 것은 끊임없는 허기였다. 어딘가 아이를 갖는 것이  순전히 모체의 입장에서 아이는 ‘침입자’와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새롭게 싹트는 생명은 아홉 달 동안 제한된 자원을 두고 모체와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짜야, 하루종일 먹는 생각만 한다니까?”

임신 경험이 없는 친구는 내 말을 도통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평소 소식좌까지는 아니어도 대식가와는 거리가 멀던 나였으니 말이다. 아침을 먹으면서 점심엔 무엇을 먹나 고민을 하고 점심을 먹으면서는 후식 고민까지 하는 게 스스로도 무척 신기했다. 입덧, 먹덧, 토덧 중 나는 먹덧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먹덧은 먹을 수 있으니 가장 낫다고들 하지만 내가 독일에 산다는 것과 남편이 외국인이라는 게 함정이었다. 한밤중 갑자기 임신 중인 아내가 먹고 싶은 게 생기면 남편들이 차를 타고 거리를 헤맨다는 것은 나에게 사치였다. 이 푸른 눈의 남자는 새벽에 나가도 미나리가 가득 든 동태탕, 알이 꽉 찬 꽃게탕 같은 걸 구해올 수 없다는 것은 자명했다.




먹덧과 별개로 다른 고충들도 찾아왔다. 별다른 이유 없이 하루아침에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기도 하고 눈이 너무나 피로해 하루종일 눈을 감고 있던 적도 있다. 코막힘이 심해져 아침부터 밤까지 코를 풀다 보니 하루가 다 간 적도 있다. 어지럼증이 심해져 침대에서 일어나다 바닥에 코를 박을뻔하기도 하고 요통이 갑자기 심해지기도 했다. 다시 찾아온 검진날 의사에게 하소연하니, 그녀는 다시 의례적인 위로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그건 임신하면 겪을 수 있는 증상 중 하나예요.”

그녀는 분명 임신이 질병은 아니라 했지만 임신이 즐겁기만 하다고 말한 적은 없다는 투였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진찰대 위에 올라 반쯤 누워 초음파를 기다렸다.


     “자, 그럼 이제 들어볼까요?”

처음으로 의사의 얼굴에 장난기 같은 게 스쳐 지나간 듯 보였고 등뒤에서 내 어깨를 감싸 쥐고 서있는 남편도 긴장된 얼굴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나 또한 떨리는 마음에 아랫도리를 홀딱 벗고 앉아있는 것도 잊을 참이었다.


빠르고 힘찬 심장소리가 진료실을 가득 채웠다. 아주 작은 생명이 내가 여기 있다고, 살아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나의 몸 안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내 몸 불능의 낙인이 찍힌 몸이 아니라 생명을 품을 수 있을만큼 강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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