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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Jun 17. 2024

아기가 자고 있어요

공공의 몸은 없다


입덧은 두 달간 계속되었다. 하루종일 불편한 속 때문에 집중해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수도 없었다. 마치 머리가 모든 종류의 복잡한 생각들을 기피하는 것처럼 말이다. 당연하게도 육아 서적을 읽는다거나 태교를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의미 없는 짧은 동영상들을 돌려보거나 이미 종영된 지 수년이 지난 예능 프로그램을 영혼 없이 시청하며 시간을 견뎌내었다. 나중엔 우리는 입덧이 길게 이어지지 않아 망정이지 하마터면 릴스만 보다가 진통이 왔을 수도 있겠다며 우스개 소리를 하기도 했었다.

 

초여름에 접어들자 어느새 배는 점차 볼록 나오기 시작했다. 독일은 연일 따듯한 날씨가 이어졌다. 우리는 얇아진 옷 위로 하루에도 몇 번씩 손을 올려 그 속에 자라고 있는 아이의 존재를 느껴보았다. 며칠 전 초음파를 통해 봤던 작은 아이가 꿈틀꿈틀 헤엄치는 모습을 떠올리며 말이다. 하지만 키가 큰 편인 나에게서 임산부의 모습을 찾는 것은 아직 이른 이야기였다. 마치 나, 남편 그리고 강아지 셋이서 공유하는 비밀처럼 아이는 하늘하늘한 원피스 아래에서 소리 없이 자라고 있었다.




     “다 맞는데 배가 안 맞아. 이것도 이것도 또 이것도! 다 지퍼가 잠기지 않는다고.”

어리둥절해하는 남편 앞에서 나는 벌써 원피스를 세 개째 갈아입고 있는 중이었다. 주말에 남편의 사촌동생 에블린의 결혼식에 가야 하는데 맞는 옷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아기는 작았지만 호르몬의 영향은 지대했다. 뒷구리에도 두둑하게 살점이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 원피스는 맞는데? 좀 배가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야.”

나는 남편을 째려보며 말했다.

     “그래! 그게 문제야.”

러시아 결혼식은 점심과 저녁 두 끼를 성대하게 차려주고 결혼식이 파하기 전에는 집안의 이모들이 각자 집에서 구워온 케이크와 차로 마무리를 맺는다. 내가 독일 결혼식보다 러시아 결혼식을 좋아하는 이유기도 하다. 배 나온 사람처럼 보이면서 배불리 먹지도 못하는 것처럼 억울한 일이 있을까. 결국 그날 나는 인터넷으로 새 원피스를 주문했다. 보드카는 못 마셔도 이모님들의 케이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결혼식 날이 왔다. 가는 길에 사 먹은 치킨너겟과 밀크셰이크가 티가 안 날 정도로 원피스는 넉넉하게 맞았다. 빨대로 빈 잔을 쪽쪽 빨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결혼식장에 도착했다. 빨간색과 파란색 풍선으로 장식된 결혼식장 곳곳에는 마블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이 모티브가 된 장식들이 놓여있었다. 부부가 둘 다 마블의 굉장한 팬이었기 때문이다. 남편과 나는 ‘토르’ 옷을 입은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블랙팬서’ 석에 앉아 결혼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보통 대게의 결혼식의 그렇듯 알지 못하는 이유로 결혼식이 지연이 되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남편의 부모님이 앉아계신 ‘헐크’ 석으로 건너가 함께 자리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고모님들, 삼촌들이 남편의 친할머니와 인사를 나누기로 했다. 안 그래도 일일이 연락을 드리는 것보다 한 번에 알리는 것이 수월할 것이라 생각한 우리는 그 자리에서 임신소식을 알렸다. 헐크석 전체가 술렁술렁하더니 모두들 환히 웃으며 축하의 말을 건네왔다.


그리고 그 순간 불쑥 배 쪽으로 낯선 손이 느껴졌다. 나의 새로 산 원피스 위를 쓰다듬고 있는 손의 주인은 남편의 큰아버지였다. 평소 과묵하신 큰 아버님과는 사실 말도 몇 마디 나누지 않았던 사이였다. 놀라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본 나는 이내 속으로 경악을 하고 말았다. 나 말고 그 누구도 이런 돌발상황에 놀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듯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문제는 아직 5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태아와 큰 아버님 사이에는 아직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아기를 갖은 순간 나의 몸은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된 것이다. 사실 그렇지는 않지만(내 몸은 여전히 나만의 것이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보다 다른 사람의 몸에 대한 지적을 상대적으로 적게 하는 이곳에서도 임산부만은 예외인 것이었다. 임신 소식을 알리면 눈은 자연히 내 배 쪽을 향했고 개중 몇몇은 예고 없이 배 쪽으로 손을 뻗기도 했다. 마치 내게는 보이지 않는 아이가 그들에게는 이미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몸과 그 경계를 존중한다. 그 몸 안에는 그 사람의 인격이 존재하고 그것은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다른 사람의 몸을 함부로 만지지 않는다. 임신을 한 나의 몸은 공공재가 아니다. 오히려 소중한 생명을 품고 있어 더더욱 존중받아야 하는 개인의 몸이다.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니 남편은 그제야 아뿔싸싶은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자신도 의례 그러려니 했지만 생각해 보니 내 아이가 자라고 있는 내 아내의 몸을 다른 사람들이 동의 없이 만지는 일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남편의 친구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 평소 나와도 잘 알고 지내는 친구여서 우리의 임신 소식을 들으니 내일처럼 기뻐해주었다. 하지만 그도 예외 없이 불쑥 내 배 쪽으로 손을 뻗으려는 것이 아닌가. 이번엔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렸고 남편은 그가 무안해하지 않게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깐, 지금 아기가 자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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