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어주기로 내어준 것도 결국 우리 자신이었으니 그대 역사에서 그대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잃은 적이 없었다.'
주체를 온전히 회복한 개인은 전생과 현생, 생의 역사에 있던 희생자-가해자의 역할 분담에서 해체된다. 이젠 이분법을 넘어창조자로서 개인이 떠안게 되는 숙제는 오로지 수용과 책임의 소재만이 남게 된다.
내 경우 그동안의 작업들을 정리하면 전생과 이번생을 통틀어 굵직한 아픔의 역사들엔 모계사회에서 가부장제로의 넘김, 그에 따른 수탈의 역사, 빼앗김의 삶 그리고 강간의 역사들이 있고. 한편 긴 시간샤먼의 삶으로 살며 받았던 핍박, 폭력, 희생들. 공동체적으론 전쟁과 기아, 약탈과 수치의 기한들을 만났었다. 그리고 이러한 아픔의 역사들이 고스란히 세포에 녹아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알았다.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선명히 다가오는 아픔의 책임들에 대하여 그 책임 안에 내가 있음을. 이 울림이 큰 통으로 가슴에 박히고 있다. 이 사실이 지금의 내겐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물려다 준다.
아픔의 역사들에 대하여- 내어주기로 택한 것, 즉 아픔과 고통을 받기로 한 것도 결국 나 자신이었다.거칠게 말하면 개인은 주체자들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고 다시 말하면 펼쳐진 세상에 내가 필연적으로 들어가 있기에. 부드럽게 말하면 개인은 한순간도 신성을 잃은 적이 없었기에. 머리는 모를 뿐 자신이-자신에게 한 것이 돼버린다. 자신이 그러기를 기꺼이 맞은 것이다. 말로 표현하려니 어렵지만.
그러니 난 내 생의 역사에서 누군가로부터 날 빼앗긴 적도 없었고 짓밟힌 적도 없다. 그저 멀리서 보면 내가 내게 아픔을 주고 고통을 느꼈을 뿐. 그것에 대한 이름을 붙이는 건 이후의 이야기들이었다. 이 말과 표현이 90의 사람들에겐 폭력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걸 알지만. 멀리 돌아보면 그렇다 나란 사람에겐.
이거였구나. 이 긴 여행을 오기 일주일 전에 '사랑과 고통, 그 연속에 흐름에서 하나가 되어보는 것을 선택하는 것'에 대하여 썼었다.
아픔에 기여하지 않았으면 결코 느낄 수 없는 것, 내게 없으면 보이지 않을 것을 느낀다. 그러니주체를 회복한 개인의 아픔엔 희생자로서의핑계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때마다 찾아오는 아픔을 느끼고 날 위로만 할 수 있을 뿐. 외부를 향해 탓할 수가 없다. 그리고 알았다. 이건 사랑이 있어야 가져갈 수 있는 마음인 거구나. 사랑과 고통의 연속선상에 있는 흐름-나에 대한 화해와 용서, 사람에 대한 사랑, 사회에 대한 사랑, 신에 대한 사랑. 고통으로 들춰지는 내 안에 깊은 사랑.
그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기에 더 이상 핑계가 없다. 충분한 앎과 애도의 시간이 지났다면 이젠 이러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냐 그리고 책임질 것이냐의 소재만 남는 것이다. 사실 반강제적이지. 돌이킬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