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물 위에 드리운 그림자
가방에 넣어둔 아스피린 두 알이 없어졌습니다. 이틀 전에는 파우더가 없어졌고, 어제는 립글로즈와 안경이 없어졌습니다.
헤어진 남자가 만나자고 해서 만났습니다. 남자는 콜롬비아 커피를 마시고 그녀는 다즐링을 마십니다. 남자가 여자의 생일을 축하하며 향수를 선물합니다. 유명한 브랜드의 인기 제품으로 이름이 롱브르 당 로 (L'OMBRE DANS L'EAU)입니다.
그녀는 놀랍니다. 자신조차 의식하지 않던 생일을 기억해 주다니... 그녀는 기분이 얼떨떨합니다. 이럴 거면 진작에 잘 하지 이제와서...
여자와 남자는 그저 그런 얘기를 나누다가 1시간 후에 헤어지게 됩니다. 남자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둡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끝내 말을 꺼내지 못합니다. 그녀도 남자의 주저함을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다행이라 여기며 지하철을 탑니다. 그와 헤어질 때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끝내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옛 연인과 헤어지고 몇 분 되지 않아 얼마 전까지 그녀를 설레게 했던 선배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두 사람은 만나기로 합니다. 남자는 이디오피아 커피를 마시고 그녀는 보이차를 마십니다. 남자가 여자의 생일을 축하한다며 향수를 선물합니다. 롱브르 당 로 (L'OMBRE DANS L'EAU)!
그녀는 다시 한 번 놀랍니다. 생일을 기억해 준 것에 대한 신기함과 얼떨떨함에 더해, 똑같은 선물이 자신에게 전해진 것이 믿겨지지 않습니다. 평소 향수를 좋아하는 향덕후도 아닌 자신에게 대체 왜? 정말 왜?!!
여자와 남자는 다소 서먹해진 공기 속에서 학교 이야기를 나누다가 1시간 후에 헤어지게 됩니다. 그때 선배 역시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하지 못합니다. 무슨 말을 하려다 끝내 못하고 돌아섭니다. 이번에도 그녀는 남자의 주저함을 눈치챕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쉬웠습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해줬으면 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헤어지고 길을 걷다 뒤를 돌아봅니다. 남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방금 전까지 함께 했던 선배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는 잠시, 시간을 잃어버리고 멍하니 서 있습니다.
향수의 이름은 '롱브르 당 로 (L'OMBRE DANS L'EAU)', 불어로 '물 속에 드리운 그림자'란 뜻입니다. 그 향기는 야생 장미향, 더 정확하게는 가시가 박힌 장미줄기가 내는 비릿하면서도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화의 풋풋한 생명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버스에 탄 그녀는 두 남자 중 누가 준 것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게 뒤섞여 버린- 두 남자가 전한 각각의 의미마저도 구별하지 못하고 뒤섞여 버린- 향수 중 하나를 꺼냅니다.
'누가 준 거지? 모르겠다~'
병의 뚜껑을 열어 코를 대어 봅니다. 손목에 살짝 뿌리고도 싶었지만 버스에 탄 이들에게 장미향이 퍼지는 것을 원치 않아 슬며시 코를 대어 봅니다. 향기가 맘에 들지만 향기에도 가시가 있는지 마음에 걸립니다. 왜 향수였을까...
향기를 맡으며 창밖 풍경을 보는데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버스에 광고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마치 그림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곧 시립미술관에서 '비극의 이미지들'이란 전시가 예정돼 있다고 합니다.
전시의 대표 이미지는 연못에 빠져죽은 오필리아의 모습을 그린 회화입니다. 19세기 라파엘 학파의 대표작가 중 하나인 존 에버렛 밀레이의 작품으로, 애인인 햄릿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사실을 알고 절망에 빠져 결국에는 연못에 빠져 죽은 여인의 이미지입니다. 비극적인 사랑의 이미지입니다.
눈도 감지 못하고 수면에 떠 있는 여자. 그녀 곁에는 수중 식물들이 (무심히도) 푸르게 자라고 있고, 그녀의 오른손에는 들꽃들이 엉켜 유영하고 있습니다. 젊은 여자의 죽음을 더욱더 비극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대비입니다.
이상한 연상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녀가 지금 맡고 있는 향기가 저 오필리어의 향기가 아닐까, 하는 상상!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장미의 향기는 길들여지지 않은 자신의 사랑(연애), 영글지 못한 그녀의 삶의 향기입니다.
집에 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합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한참이나 쳐다봅니다.
그러다가 뿌옇게 서리가 낀 거울에 글씨를 써봅니다.
‘토끼야! 토끼야!’
그녀는 오랜 샤워를 마치고 나와 냉장고에서 일주일이 넘은 딸기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습니다. 그러다 문득 결혼에 대한 몽상에 빠져듭니다. 갤러리에서 결혼을 하는 자신을 상상합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옆에서 결혼을 해도 좋겠다 생각합니다. 그녀는 에드워드 호퍼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결혼과 에드워드 호퍼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샤갈이면 괜찮겠습니다. 환상적이겠습니다. 그러다가 시선은 오늘 받은 두 개의 향수로 향합니다. 그리고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로 생각이 이어집니다. 비극적인 사랑의 이미지.
갑자기 짜증이 납니다. 갑자기 눈물이 납니다.
왜 짜증이 나는지, 왜 눈물이 나는지 그녀는 또 알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