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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그레이 Jun 01. 2024

쪽팔린 게 날아 차기 보다 더 아팠다

12화 거짓말이 아니라 혼잣말을 했을 뿐이었다.


슬러시 사건 이후, 어머니는 내 학교생활이 걱정되었는지 학교 봉사활동에 더 활발하게 참여하고 재물을 기부하기도 했다. 마치 그녀가 자신의 힘과 위치를 드러내면서, 내 배경을 과시하려는 듯했다.

그중 하나는 미화를 목적으로 교실에 동물들을 들여놓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우리 반 창가에 큰 사육장 세 개를 설치했다. 이구아나 두 마리와 수십 마리의 햄스터가 들어있었다. 나는 집안 가계가 걱정됐고, 그녀가 너무 유난 떠는 것 같아 낯부끄러웠다. 하지만 담임교사와 아이들이 정말 좋아했고, 이에 나도 어깨가 으쓱했다. 어느 순간, 햄스터 한 마리가 유독 몸덩이가 커지면서 예민해졌다. 담임교사는 그 햄스터가 새끼를 뱄다며, 나와 어머니에게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울 것을 당부했다. 어머니는 이러한 지시를 탐탁지 않게 여겨 아무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반면 나는 새끼 햄스터의 탄생을 고대하며 극진히 살폈다. 햄스터의 임신 기간 동안, 나는 종종 교사보다 먼저 교실에 도착했다. 교사들은 교무실로 출근하여 아침 업무를 처리한 뒤 각 학급을 찾아갔다. 교사가 도착하기 전까지 교실 문은 잠겨 있었다.

나 말고도 많은 학생들이 일찍 등교해 문 개방을 기다리곤 했다. 대부분은 각자의 교실 앞에 모여서 수다를 떨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여름철 바다의 소란스러운 파도처럼, 차가운 테라초 바닥 위에서도 따스함을 전파했다. 나는 수면 아래 미동도 없는 난파선 마냥, 그저 쭈그려 앉아 있었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반 앞에는 열댓 명쯤 모여 있었다. 나는 혼자 앉아서 테라초 바닥에 박힌 돌을 색깔별로 세어 보고 있었다.

그때, 아크릴판에 달린 열쇠들이 찰랑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담임 선생님 오신다.』  나는 조용히 혼잣말하며 일어났다. 다른 아이들은 한쪽 복도의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쭉 훑어보았다. 아래층에서 들리는 소리였으니 당연히 이곳에는 없었다.

『에이, 너 장난하냐?』 그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타박했다. 『정말이야, 정말 오셨어.』 나는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왜 거짓말해, 뒤질래?』 한 남자아이가 공격적으로 다가왔다. 거짓말이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피력했으나, 추궁은 계속 됐다.


 『왜 거짓말해? — 거짓말 아닌데. — 아침부터 말대꾸야, 장난하냐? — 장난 아닌데. — 근데 왜 웃어? — 웃은 거 아닌…욱. 』  


내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그가 거의 날아오르며 내 명치를 찼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다른 반 아이들까지 모두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어떤 아이는 더 때리라고 부추겼고, 어떤 아이는 쏜살같이 달려와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다. 또 다른 아이는 조금 놀란 모습이었지만, 흥미진진한 광경을 놓치고 싶지 않은 듯, 벌어진 입을 손으로 막고 계속 관망했다.

『왜 때려, 선생님 진짜 왔어.』 나는 급소를 제대로 맞아 숨이 막혔지만 창피하고 무안한 기분은 더 싫었다. 고통에 굽어지려는 허리와 수그러드는 턱을 억지로 세우고 당당히 맞섰다.

『아프지도 않냐? 왜 거짓말해.』 그는 한번 더 날아 찰 기회를 노리는 듯했다. 나는 생명에 위협을 느꼈지만 수치스럽게 굴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진짜면 어쩔래?』 결백을 공고히 할 기회를 읍소하면서, 쪽팔리지는 않을 적절한 언사를 구현해 냈다.

『만약에 안 왔으면 한 대 더 맞을래?』 그는 더 위협적으로 응수하며 굳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도드라진 광대뼈는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붉어졌다. 곧 터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무식한 도전과 논지 없는 주장에 굉장히 불쾌했지만 당장의 섣부른 반증은 내 목숨을 담보로 해야 했다.

「만약에 오셨으면 네가 한 대 맞을래?」라고 되받아 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 충동을 견디느라 온몸의 털이 북극의 새벽 서리에 휘감긴 듯 곤두섰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 내면에서 나 자신과 협상한 끝에, 가장 덜 초라한 답변을 내놓았다.


『선생님이 어디 계시죠?』 그가 얄밉게 물었다. 손으로 왼쪽 복도를 가리키고 고개를 까딱하며 『여기?』 하고, 오른쪽 복도를 가리키고 고개도 같이 돌리며 『저기?』 하고 물었다. 교사가 이곳에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다. — 그를 보면서 가슴이 답답했다.  당장 말문을 열어 반박하고 싶었으나, 그때의 나는 원하는 말을 재빨리 내뱉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릴 적에는 더욱 심각했다. 발화의 문제를 넘어서 말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조차 벅찼고, 일상적인 대화 속도에 한참 뒤처져 따라갈 수 없었다. 속도는 조금 느리더라도 글을 쓰거나, 읽고 이해하는 능력은 동년배보다 월등히 앞서 있었다. 하나, 대화에서는 매번 어려움에 부닥쳤다.

다른 사람들의 말은 소음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말을 걸면 그것이 외국어처럼 느껴졌다. 나는 상대의 말을 머릿속에서 여러 번 되뇌며 문장을 한 단어씩 해체했다. 각 단어의 의미를 떠올린 다음, 다시 그들을 연결해 앞부터 순서대로 해석해야 했다. 이 과정 없이 자연스럽게 말의 뜻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에 상대는 벌써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이전의 말도 놓치고, 다음 말도 쫓아가지 못해 한 마디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에 자주 이르렀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뒤늦게나마 이해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밤에 갑자기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듯 ‘띵’ 하더니, 아침에 들은 말이 이해되기도 하고, 때로는 며칠이나 몇 주가 지난 후에야 그 뜻을 알아차리기도 했다. — 그러니 그날, 내게 아무리 명백한 항변 거리가 있더라도, 말다툼은 고사해야만 했다. 짧지만 명료하게 언명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순식간 그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할 예리하고 첨예한 처사가 필요했다.

「잘 들어, 난 1층에서 들려오는 선생님의 발걸음과 열쇠 소리를 분명히 들었어. 귀가 밝아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도 잘 듣거든. 물론 넌 듣지 못했고, 보이지 않는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할 만큼 머리가 좋지도 않지. 이 머저리야, 당장 내려가서 직접 확인하렴 네 무지를. 」이라는 식으로, 보통 아이들이라면 말했을 것이다.


『1층에….』  


나는 조금 더 단순하고 명료하게 대답했다.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킨 듯 보였다. 몇몇 아이들이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와다다 달려갔다. 교사의 소리가 들리던 것이,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잠시 어디인가 들른 듯했지만 마침 다시 소리가 들렸다.

『와! 진짜다! 3반 선생님 올라온다!』

아이들은 금세 도로 뛰어올라오면서 도망치듯 흩어졌다. 우리 반 아이들도 재빨리 뒷문 앞에 줄을 섰다. 찰랑찰랑하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며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명확해졌다.

나를 때린 아이도 세상의 모든 순진한 얼굴을 하고 차분히 줄을 섰다. 나 역시 뒤에 서서 이 수모를 언젠간 되갚아주리라, 불타는 눈동자에 그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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