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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그레이 May 30. 2024

바퀴벌레 집에 살던 나의 슬러시는 서러움이 되어

11화 어렸던 나에게 가난이란 무엇이었을까.


소희가 태어난 후, 외할머니가 자주 우리 집에 머물렀다. 어머니는 일한다며 외출이 잦아졌고, 그 사이 할머니가 동생들을 돌봤다. 동시에 이 가정의 경제 상황은 더 어려워졌다.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어머니가 무서운 금액의 사채 빚을 졌기 때문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비가 새긴 했어도, 햇빛이 들던 3층 집에서, 어둡고 숨 막히는 반지하로 이사하게 되었다. 이 집에는 성인 손가락 두 개정도 크기의 바퀴벌레들이 기고, 날아다녔다. 자려고 불을 끄면, 장롱 뒤에서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 소리가 나를 괴롭혔다. 바퀴벌레는 내 공포가 극에 달할 때쯤 날개를 펼치고 튀어나왔다. 아버지는 밤마다 불을 켜고 바닥, 벽, 공중의 벌레들을 잡으러 다녔다. 나는 이불을 단단히 뒤집어쓰고 발가락 하나도 내놓지 않았다.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찬장을 열면 쌀알보다 큰 바퀴벌레 알이 있었다. 바퀴벌레, 무당벌레, 귀뚜라미, 나방, 돈벌레, 지네, 거미 등 온갖 벌레가 집을 점령했다. 이 징그러운 존재들은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때로는 소리를 지르고, 때로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불이 있으면 그 속에 숨었고, 없을 때는 눈을 가리고 온몸을 웅크렸다.


어두워진 집과 함께 내 인생도 더 암암해진 듯했다. 그렇게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다툼도 잦아졌고, 가정에 더 많은 곡절이 시작됐다. 가난은 성격에도 영향을 주었다. 가난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더욱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가정의 불화 속에서 태어난 동생들도 내게 그 영향을 주긴 마찬가지였다.


다시 파란만장한 삶을 들여다보면, 학교 앞에서 슬러시 한 컵을 사서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같은 반 아이가 다가와 슬러시를 한 입만 달라고 했다. 아직 내 입에도 대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싸움을 하는 등 친구가 없었다. 그 아이도 내 친구는 아니었지만 나는 호의를 베풀어 그에게 슬러시를 건넸다.


그는 컵을 건네받자마자 빨대를 뽑아 바닥에 던지고, 반 컵 이상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승리의 달콤함을 맛본 표정으로 팔을 뻗어 내게 컵을 돌려주려 했다. 내 마음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단지 컵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손을 내밀자, 그는 컵을 꽉 쥐어 구겼다.


쨍한 주황색 슬러시가 그의 손등 위로 흘러넘쳤다. 모든 것이 나를 골리기 위한 고의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달동네 반지하에 살면서, 어쩌다 받는 몇백 원으로 산 슬러시였다. 부모님이 가난하다는 것을 알기에 용돈을 달라고 하지도 못했었다. 사실, 우리 가족이 끼니를 거러야 할 만큼 가난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린 나에게는 그 작은 가난도 가슴 미어지는 고통이었다. 그 시절 찢어진 장판처럼, 구멍 난 방충망처럼, 내 마음도 너덜너덜해져 갔다.


300원짜리 슬러시를 사러 가면서, 이 돈으로 더 좋은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우리 집을 더 가난하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과 고민에 빠졌었다. 돈을 내고 문방구 아저씨가 레버를 내려 슬러시를 따라 줄 때도, 컵을 가득 채워주지 않을까 봐 조마조마해했다. 다 따른 후에는 기계 입구에 남은 한 방울까지 아쉬워하며 돌아섰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혹시라도 흘릴까 봐, 두 손으로 쥐고 천천히 걸었다. 게다가 동생과 어머니에게 먼저 주고 싶어서 소중히 바라만 보던 중이었다.


나는 부아가 상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입술을 잘근 물고, 그의 목덜미 옷깃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는 목이 졸려 캑캑 대면서도, 유쾌하게 웃었다.


나는 남은 슬러시를 그 얄미운 얼굴에 부어버렸다. 그러자 그는 질겁하면서 도망쳤다. 나는 감정이 고조되어 폭주하며 쫓아갔고, 금세 따라잡았다.


『슬러시 다시 내놔!』 그의 머리채를 잡고 말했다.

『퉤, 다 먹었는데?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 봐!』  그가 바닥에 침을 탁탁 뱉으며 말했다. 나는 복통을 느낄 만큼 화가 났다. 분풀이하듯 그의 다리를 여러 번 걷어찼다. 빳빳한 분홍색 가죽 구두가 그의 정강이에 시원하게 박혔다.


그날도 나는 집에 돌아가 흠씬 두들겨 맞으며, 죗값을 치렀다. 어머니의 몽둥이는 항상 재빨랐다. 그녀는 한 번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말할 기회조차도 없었다. 언제나 다른 이의 부모가 되어 나를 응징하는 듯했다.


물론, 기회가 있었어도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며, 어머니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아버지가 오토바이를 타고 오면 얼마나 놀림받는지, 그게 얼마나 창피한지. 가난이 얼마나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그 슬러시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이런 것들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언어 사용이 미숙한 탓도 있었으나, 그보다도 중요한 건, 부모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더욱더 함구했다는 것이다.


이전 10화 어머니의 보따리에 질투와 사랑의 원천이 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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