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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다락방 Mar 14. 2023

여수에서 인생해물탕을 만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여수여행

예술의 섬 장도의 맑은 바닷물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차를 타고 향일암으로 향했다. 토요일 오후 3시. 차가 막혔지만, 굽이굽이 이어진 시골 도로는 정겹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남해의 절경은 황홀했다. 여수 시내에서 향일암까지 교통체증으로 인해 차가 느릿느릿 움직였고 뒷좌석에 탄 언니는 이내 달콤한 낮잠에 빠졌고 운전자가 자면 안 된다며 계속 옆에서 수다를 주거니 받거니 하던 언니도 어느 순간 조용해진 걸 보니 눈이 감겨있다. 운전하느라 힘든 것이 아니라 운전자만이 누릴 수 있는 이 순간이 감사했다. 아름다운 여수의 산과 바다를 오롯이 혼자 독차지한 것은 오묘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수 향일암에 도착해 주차한 뒤 가파른 언덕을 넘어 계단을 따라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그런데 내려오는 관광객들의 손 여기저기에 투명 과자 봉투가  들려있다. 자세히 보니 옛날 과자 같다. 정상에서 파는 건지 괜히 나도 하나 사고 싶어지는 쇼핑 욕구를 차곡차곡 채우며 등용문을 시작으로 기암괴석 사이를 지나 이윽고 거대한 석문을 만났다. 이곳이 바로 해탈문이다. 다시 거친 숨을 내뱉다 보면 어느새 눈앞에 대웅전이 나타난다. 1949년에 편찬된 여수지에 의하면 향일암은 암자가 바위 끝에 붙어 있고 계단 앞은 벼랑인데, 동쪽으로 향하고 있어 일출을 바라볼 수 있어서 향일(向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규모라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눈앞에 펼쳐진 남해의 황홀경을 볼 수 있기에 유명한 암자가 아닐까 하며 시원한 바닷바람으로 이마에 몽글몽글 맺힌 땀을 식히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하산을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 내려가는 길목에 한과를 만들어 팔고 있는 상점이 있다. 인심 좋은 사장님은 시식해 보라며 여러 종류의 한과를 권한다. 한 개만 주는 것도 아니다. 서너 개씩 손에 쥐여주며 안 사도 괜찮으니 일단 먹어보라며 권한다. 일단 먹어보면 안 살 수가 없는 맛이다. 달콤한 조청에 구수한 메밀이 묻은 한과를 향한 끌림에 나도 모르게 자꾸 손이 갔다. 한과의 유혹에 넘어간 세 여인의 손에는 어느새 한과 봉투가 하나씩 들려져 있었다. 달콤한 한과를 맛보니 집에 있는 아이들과 남편 얼굴이 아른거린다. 분명 내가 더 먹고 싶어서 산 것이 아니다. 한과는 아이들 선물로 산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합리적인 구매라며 스스로를 칭찬한다. 2박 3일 집 떠난 엄마보다 엄마 손에 들린 한과와 낙지젓을 더 반길 것 같아 살짝 속은 쓰리겠지만 일단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되니 아이들과 남편에 대한 미안함도 조금 줄어든 기분이다.

     

향일암의 풍광을 눈에 가득 채우고 한 손에는 한과 봉투를 들고 저녁을 먹으러 바삐 움직였다. 여수에서의 마지막 만찬은 갈치조림 식당 사장님이 추천해 주신 용궁해물탕으로 결정했다. 여자 셋이 해물탕 중자를 시킬지 대자를 시킬지 고민하다 이왕 먹는 거 큰 거 먹자며 해물탕 대자에 낙지 탕탕이까지 추가한다. 그래 다이어트는 언제나 내일부터니까. 인천 앞바다에 살고 있지만, 서해와 남해는 엄연히 다르니까 해산물 맛도 다를 것 같은 기대감이 차오른다.

     

이윽고 잘 차려진 해물탕 한 상. 냄비 안에는 싱싱한 해산물로 그득했고 왕처럼 냄비 한가운데 자리 잡은 문어는 탈출하려고 안달이 났지만 이내 숨을 죽였다. 그리고 고소한 참기름에 꿈틀대던 낙지 탕탕이를 바라보다 숟가락으로 푹 떠 입 안에 넣었다. 미끄덩한 낙지와 참기름이 만나 요리조리 입안을 헤엄친다. 살캉살캉한 식감이 너무 좋다. 숟가락이 바삐 움직이니 낙지 탕탕이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해물탕이 끓어오르기를 기다리며 식당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원산지 표시판이 눈에 띄었다. 해산물이 전부 국내산이다. 이래서 신선했구나, 이래서 고향식당 사장님이 추천해 주셨구나 하며 끓어오르는 해물탕 국물부터 한 입 맛본다. 싱싱한 해산물에 국물마저 진국이다. 고춧가루의 텁텁함이 느껴지지 않았고 해산물이 육수와 조화를 이루어 만장일치로 ‘이것이 바로 진짜 해물탕이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갑자기 해물탕 좋아하는 부모님 생각이 난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자식이 먼저 생각나는 법인데 이 집은 엄마가 먼저 떠올랐다. 우리 엄마도 해물탕 참 좋아하시는데 다음에 꼭 여수에 모시고 와서 장도 구경도 하고 용궁해물탕도 맛 보여 드려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친절한 해물탕집 사장님은 고향식당 사장님이 추천해 주셔서 왔다는 말에 전복도 더 넣었다며 뭐라도 더 주시려 애쓰시는 모습이었다. 사실 해물탕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용궁 해물탕을 먹고서는 마음이 변했다. 앞으로 무슨 음식을 좋아하느냐고 누가 물어보면 ‘해물탕’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나에게는 특별한 해물탕이었다.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가느냐도 중요하다. 음식 또한 마찬가지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허기진 배에는 물만밥에 김치만 먹어도 꿀맛이거늘 좋아하는 동네 언니들과 아름다운 여수에서 맛있는 밥을 먹으니 진짜 식구가 된 것처럼 뱃속도 마음도 든든해졌다. 비록 2박 3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만 유효한 식구였지만 참으로 좋다. 불혹을 넘어 지천명으로 향해가는 여정을 함께 할 수 있는 그녀들이 곁에 있어 더 행복한 여수에서의 2박 3일이었다.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여운이 남는 여수. 가족들과 다 함께 다시 가고픈 여행지 1순위로 저장해 둔다. 오늘 밤은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를 흥얼거리며 눈을 감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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