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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희 Jun 19. 2019

나를 위한 선물

혼자가 익숙한 그대에게


지난해 여름 강의를 갔을 때였다. 강의장이 바닷가 쪽이었고 강의가 끝나고 해변을 찾을 계획이었다. 일도 하고 휴식도 하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님도 보고 뽕도 딸 생각으로 발걸음은 가벼웠다. 

하지만 그 날 강의는 쉽지 않았다.      


넓은 강당에 나보다 몸짓이 큰 학생들을 모아놓고 하는 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잘해보고 싶은 욕심만큼 결과는 따라주지 않았고 한 마디로 멘붕이 온 상태였는데, 관계자 분들 말씀으로는 그 정도면 아이들의 반응은 양호했다는 것이다. 담당자의 말을 위로 삼으려 했다가, 자책을 했다가... 수시로 냉탕과 온탕을 가는 기분은 한마디로 고등학생들에게 단단히 기가 빨린 상태였다.      

 만족스럽지 못한 강의를 마치고 힐링이 필요했던 나는 바닷가로 예쁘게 나 있는 도로를 달렸다. 그러다 마침 소박하게 예쁜 해변을 발견하고는 차를 근처 소나무 아래에 대고 공공화장실을 찾아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하던 요즘 유행하는 영화의 대사처럼 나는 다 계획이 있었다. 홀로 반나절 바캉스를 즐길 참 있었다. 

한창 성수기가 지나고 해변은 한산했다. 물이 차가워서 몸을 담글 수는 없었지만 모래사장에 1인용 매트를 깔고 누우니 세상 천국이었다. 텅 빈 바다와 잡음 없는 파도소리까지... 내가 원하던 바로 그것이었다. 햇살이 뜨거워 금세 콧잔등에 땀이 났다. 미리 챙겨 온 양산을 살포시 펴서 파라솔처럼 머리맡에 놓으니 적당한 그늘이 생겨서 좋았다. 선크림을 온몸에 바르고 본격적으로 일광욕을 할 자세를 갖추었다. 눈을 감고 누워있자니 언젠가 휴가로 다녀온 오키나와가 떠올랐다. 파도소리가... 똑같았다. ‘아... 나는 오키나와에 있다’라고 생각하자 휴양지가 부럽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온통 모든 것이 내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다도 바람도 햇살도 파도소리도... 돈을 주고 산 것도 아닌데, 큰돈 들여 비행기 타고 다녀온 휴양지와 다를 게 없었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충분히 좋다!’라며 감동 중이었다.      


그러다 적당히 불어 좋다 싶었던 바람이 양산을 데려갔다. 데굴데굴... 펼쳐져 있던 양산은 바람을 타고 모래 위를 굴렀다. 잡을 거리에 있다 싶어 다가가면 또다시 바람이 불어와 양산과 나의 거리가 멀어졌다. 이제는 멈추었다 싶어 다가가면 또 멀어지고, 멀어지고...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나 보던 나잡아 봐라 놀이라도 하자는 듯 양산은 나를 약 올리려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양산 잡기를 포기했다. 내 시간을 즐기는데 집중하기로 하고, 다시 백사장에 누워 햇살을 즐기기 시작했다. 

한적한 시간을 즐기고 있는 내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혼자 수영복 차림으로 때늦은 바캉스를 즐기는 ’혼캉족’이라니... ‘내가 좀 유별난가?’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하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망쳐버린 강의로부터 회복되고 있었다. 입가에 배시시 미소가 번졌다. 




그런데 그 순간, 나를 향해 누군가가 걸어왔다. 얼굴을 다 가리는 커다란 모자를 쓴 아주머니였다. “이거, 댁 것 맞지요? 날아오는 걸 봤는데 필요할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어머, 감사해요. 하도 멀리 날아가서 잡으려다가 관뒀거든요. 비싼 것도 아니고요...”

물건을 너무 쉽게 포기한 것이 어찌 보일까 싶어 말이 길어진다. 

“그래도, 비싸든 안 비싸든 내 것은 다 소중하잖아요.”

아... 쉽게 포기한 그것이 내 것이었다는 것. 소중히 했어야 하는 내 소유의 모든 것이 하나 둘 떠올랐다.      

양산의 가격이 비싸게 준 것이라면 그렇게 쉽게 포기했을까?

좋은 사람이 선물해 준 것이라면 그렇게 쉽게 도망가는 양산 잡기를 그만뒀을까?

어디에서 산 것인지, 그냥 우연히 얻은 것인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 양산은 비상용으로 차에 두고 다니던 것이어서 내겐 아무런 정보도, 의미도 없는 그냥 있으나 마나 한 것이었다. 갑자기 소나기라도 내리면 펼쳐 비를 피할 수 있고, 늘 필요하지는 않지만 1년에 두어 번 쓸모가 있을법한 그런 물건이었다. 한마디로 애정이 없었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이 자꾸 마음에 울렸다.     


“내 것은 다 소중하잖아요.”     


주름진 얼굴이 검게 그을린 것으로 보아 연세는 예순을 넘기신 것 같았고, 그 삶이 녹록지는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 살면서 크게 호사를 누리지는 않았을 것 같은 그녀의 소박한 말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내 것이라면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소홀히 하지 않았을 것 같은 느낌 말이다.      

반성이 되었다. 흔해서, 귀하지 않아서, 예쁘지 않아서 홀대했던 그 무엇들에 대해서 잠시 마음이 머물렀다.      

모든 것들이 너무 흔해졌다. 그러니 같은 용도의 물건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기도 한다. 가치가 없어진다. 소중함이 없다. 

그 날 그 양산이 누군가 준 선물이었다면 나는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었을까? 모래사장을 국가대표 선수 훈련이라도 하는 양 뛰어가지 않았을까? 조금 피곤했던 그날의 컨디션이 핑계가 아니라 물건에 가치를 두지 않고 그대로 날아가게 두었던 애정 없는 나의 마음이 이유였던 것이다.

적당한 값을 지불하고 소유한 물건이 시간이 지나도 계속 가치를 지니고 있기는 쉽지 않다. 물건이 지닌 값어치 말고도 애정이 더해지고 의미가 더해져야 소중해지는 공식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내게 의미 있는 소중한 것들을 생각해 본다. 비싼 값을 치러서 의미가 있는 것도 있을 테지만 작아도 소중한 그 무엇이 분명히 있다. 

내게는 아이들이 남겨준 자그마한 손 편지에 메모까지도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다. 아이가 전해준 그 날의 감동을 행여 잊을세라 꼬깃꼬깃해진 종이 쪼가리마저도 버리지 못하는 그 마음을 엄마들이라면 알 것이다. 그때의 마음, 온전히 나에게 기울인 아이의 마음처럼 의미 있는 것이 있을까. 자꾸만 변해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너희들이 한때는 이렇게 순수하게 엄마를 사랑했노라고 기억하고 싶은, 그래서 억지스러운 욕심처럼 지나간 흔적이라도 부여잡고 있는 그 마음을 아이들은 알까. 

아이들이 내게 준 마음이 소중해서 십 년이 넘도록 차곡차곡 수집함에 쌓아두는 아날로그적인 모성 말이다.      

시간이 흘러도 잊고 싶지 않은 의미 있고 소중한 그것. 철 지난 바닷가에서 눈을 감고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영락없이 휴양지의 그것과 같다며 애써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파란 하늘과 내리쬐는 햇살이 온통 내 것이라며 여유를 부린 한 시간의 호사가 여전히 내게 의미 있는 것도, 평생을 두고 기억될 오직 나를 위한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BGM_A Little peace_Nic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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